와인바에서 부산 대표 다이닝이 되기까지 - 김재훈 셰프의 팔레트

파인다이닝부터 돼지국밥까지, 김재훈 셰프가 결국 좇는 것은 하나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맛을 가장 자기답게 만드는 것.

북적거리는 해운대 해변의 활기를 뒤로 한 채 달맞이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주변이 한적해진다. 가로수가 쭉 늘어선 고즈넉한 언덕길 위, 바다를 마주한 건물의 3층. 탁 트인 커다란 창 너머로 해운대 앞바다의 수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곳에 팔레트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에서 오래 미식을 즐겨온 사람이라면 이 자리가 낯설지 않다. 한때 부산을 대표하던 프렌치 레스토랑 메르씨엘이 있던 곳이다.

‘팔레트’라고 들으면 흔히 물감판(Palette)을 떠올리기 쉽다. 음식과 와인의 맥락에서는 맛을 느끼고 분별하는 미각이나 입맛을 가리키는 이 Palate라는 단어를 김재훈 셰프는 식당의 이름으로 골랐다.

 

부산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팔레트의 다이닝 홀

지금의 팔레트만 보면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다. 2019년, 부산 남구 용호동의 한 횟집 건물 3층에서 문을 열 당시 팔레트에는 테이블 여섯 개와 홀 스태프 한 명, 주방에는 김재훈 셰프를 포함한 요리사 두 명이 전부였다.

김재훈 셰프가 처음 구상했던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유롭게 내고, 편하게 와인 한 잔을 곁들일 수 있는 알라카르트 중심의 식당이었다. 와인바로 운영을 이어가며 조금씩 코스를 선보였고, 2023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다이닝 코스에 집중했다. 이듬해인 2024년 2월, 부산이 처음 포함된 미쉐린 가이드에서 1스타를 받았고, 같은 해 11월 말 용호동을 떠나 달맞이언덕의 현재 공간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테이블 여덟 개와 별도의 룸 하나를 갖췄고, 주방 9명과 홀 팀원 5명, 모두 14명이 함께 일한다. 몇 년 사이 규모도, 포맷도, 서비스도 크게 달라진 것이다.

 

점심에는 팔레트에 바다와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부산에서 시드니까지, 요리사가 되어간 시간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재훈 셰프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요리를 시작한 것은 스물다섯 살 무렵. 대학가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내는 식당의 주방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양파를 썰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왜 칼집을 이런 식으로 넣어야 하는지 선배에게 물었지만, 제대로 된 설명은 듣지 못했다. 방법만 따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리와 이유를 알고 싶었던 그는 결국 다른 환경에서 요리를 배워보기로 했고, 호주 시드니로 건너가 르 코르동 블루에서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문 파크(Moon Park)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당시 문 파크는 Sydney Morning Herald Good Food Guide에서 1 Chef’s Hat을 받은, 시드니에서는 보기 드문 모던 한식 레스토랑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음식을 먹었고, 이후 그곳에서 스타지를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평소 좋아하던 시드니의 파인다이닝 LUMI에서 약 2년간 일했다.

호주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그는 이런저런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애당초 2년 정도만 지낼 생각이었던 체류는 어느덧 7년까지 이어졌다. 카페에서 일해보기도 하고, 하루 600~800명의 손님을 받는 대형 업장도 경험했다. 이력서에 굳이 적지 않은 크고 작은 주방도 거쳤다. 그 시간 동안 김재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LUMI의 당시 수셰프 히로시 마나카(Hiroshi Manaka)였다.

 

팔레트의 김재훈 셰프

“마나카상은 일단 문제를 해결해 줬어요. 손님한테 나갈 완벽한 상태를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혼을 냈죠. 슈퍼맨 같은 사람이었어요.” 김재훈 셰프가 질문하면 마나카는 자신이 아는 데까지 설명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모르는 부분은 함께 고민하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후배의 질문을 귀찮아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성장해 나갈 기초를 다져준 선배였다. 김재훈 셰프 역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쉬는 날에도 주방에 나갔다. 그의 일을 먼저 거들어가며 배울 시간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이런 소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조리하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여전히 시드니에 있는 마나카에게 연락한다. 마나카 역시 해보지 않은 것이라면 직접 시도해 보고, 때로는 요리 과정을 사진으로까지 남겨가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제가 같이 일하는 요리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에요.” 김재훈 셰프가 마나카에게서 배운 것은 조리 기술에 그치지 않았다. 바로 한 명의 요리사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이었다. 마나카는 김재훈 셰프가 앞으로 어떤 요리사가 되고 싶은지를 처음 구체적으로 생각하게끔 해준 사람이었다.

호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서울의 제로컴플렉스에 수셰프로 합류해 1년여를 일했다. 이후 본인의 이름을 건 팝업 행사를 하며, 그는 만약 자신의 식당을 연다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가까이 고향과 떨어져 지낸 그리움과 더불어, 서울의 높은 임대료와 운영비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본심은 그보다 더 단순했다. 서울 생활을 이어가며 앞으로도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부산은 좀 사는 맛이 있잖아요.” 그의 선택은 2019년 12월 용호동에서 팔레트를 여는 것으로 이어졌다.

 

팔레트의 석양

 

맛으로 느끼는 계절

김재훈 셰프가 본인의 요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은 ‘선명한 맛’이다. 강한 산미나 염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재료와 조리법이 겹쳐도, 한 입안에서 무엇을 맛보게 하려는지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생각해야 하는 것보다는, 한입 먹었을 때 바로 맛있다고 느껴지는 맛을 추구해요.” 주방에서는 여러 기법을 거치더라도, 손님에게 닿는 순간에는 맛이 또렷해야 한다. 산미와 지방, 향과 질감은 중심이 되는 맛을 살리는 데 쓰인다. 팔레트의 바탕은 프렌치 퀴진이지만, 그 위에 쌓는 맛의 무게와 구성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말하는 계절감은 제철 식재료를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여름에는 자칫 텁텁하게 느껴질 유제품의 사용을 줄이고, 다시 육수 등을 이용해 감칠맛이 또렷한 소스를 만든다. 덜어낸 지방감이나 질감은 올리브유나 가니시로 보완한다. 반대로 날씨가 추워지면 조금 더 농도 있고 녹진한 소스를 사용한다. 제철 재료만으로 계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접시를 먹는 동안 느끼는 온도와 질감, 식사를 마친 뒤의 느낌까지 그날 날씨와 어울려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 계절을 가르는 기준은 달력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날씨다. 

“날씨는 입는 옷이나 피부에 와 닿는 게 제일 중요해요. 아무리 입추라고 해도 더워 죽겠는데 어떻게 가을 음식을 해요.”

제철 재료는 저마다 가장 좋은 순간이 다르다. 같은 달이라도 기온과 날씨에 따라 시장에 나오는 식재료가 달라지고, 맛과 상태 역시 달라진다. 김재훈 셰프가 육류보다 해산물을 선호하는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 생선은 철이 바뀌면 지방의 양과 맛이 눈에 띄게 달라지지만, 붉은 고기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그만큼 느끼기가 어렵다. 그는 그때그때 들어오는 식재료의 상태를 보며 메뉴를 조절한다.

 

서비스를 준비 중인 팔레트 팀

 

팔레트가 여름 갈치를 다루는 방식

팔레트의 갈치 요리는 김재훈 셰프가 계절을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한여름의 갈치는 겨울에 비해 지방이 가볍고 살이 부드럽다. 김재훈 셰프는 이때의 갈치에서 두툼한 살이나 기름진 풍성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크고 두꺼운 갈치 대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갈치를 사용한다. 이를 돌돌 말아 꼬치에 꿰고, 숯불에 구워 은은한 불향을 입힌다.

소스도 버터나 크림으로 농도를 내는 대신 표고버섯 다시를 사용해 맑은 감칠맛을 낸다. 여기에 꽈리고추 퓨레의 풋풋함과 살짝 매운맛, 산초장아찌와 오일의 알싸한 향을 더한다. 부드러운 갈치 사이사이에는 튀긴 대파와 흑미, 백 다시마를 곁들여 바삭한 식감과 함께 자칫 부족할 수 있는 지방감을 더한다.

김재훈 셰프가 식재료에서 산지보다 먼저 보는 것은 그 계절에 가장 좋은 상태인가 하는 점이다. 부산에서 요리한다고 해서 산지를 부산에 한정하지 않는다. 갈치는 원하는 크기와 상태를 맞추기 위해 제주에서 당일 항공으로 받고 있다. 겨울에는 부산에서 좋은 삼치가 나오기에, 그때는 부산산을 쓴다.

 

부산 돼지국밥에는 정답이 없다

팔레트의 돼지국밥은 올 초 서울의 쵸이닷, 하노이의 온빛(Onvit)과 협업 메뉴를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첫 버전은 밥 대신 오르조 파스타를 사용했고, 고기도 일반적인 돼지국밥처럼 육수를 내는 과정에서 함께 익혔다. 이후 메뉴를 계속 손보며 오르조는 쌀로 바뀌었고, 고기도 따로 조리하기 시작했다. 오래 삶은 고기에서 날 수 있는 돼지 특유의 향은 줄이고, 삼겹살과 항정살의 맛과 식감을 풍부하게 살리기 위해서였다.

부산 가락 지역에서 재배한, 찰기 좋고 은은한 단맛이 나는 ‘황금예찬’ 품종으로 밥을 짓고 돼지 육수에 토렴한 팔레트만의 돼지국밥

 부산의 돼지국밥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여러 방법을 거듭할수록 고뇌는 계속되었다. 맑은 국물을 내는 집도, 뽀얗게 끓이는 집도 있다. 집집마다 쓰는 고기 부위가 다르고, 부추와 새우젓을 곁들이는 방법부터 쌈장을 풀거나 우동을 넣는 방식까지 제각각이다. 부산 사람마다 오래 다닌 단골집이 있고, 떠올리는 국밥의 맛도 다르다. 김재훈 셰프 역시 이 익숙한 음식을 팔레트에서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한 끝에,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국밥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의 한 그릇은 그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산 가락 지역에서 재배한, 찰기 좋고 은은한 단맛이 나는 ‘황금예찬’ 품종으로 밥을 짓고 돼지 육수에 토렴한다. 따로 조리한 삼겹살과 항정살을 올리고, 새우젓은 그대로 곁들이는 대신 튀겨 짠맛과 함께 바삭한 식감을 더한다. 밥 아래에는 돼지고기로 맑게 낸 콩소메를 붓고, 같은 콩소메를 폼으로도 만들어 위에 얹는다. 국밥에 빼놓을 수 없는 다대기는 마지막에 오일로 둘러 매운맛과 향을 더한다.

 

팔레트의 다시마 아이스크림. 감칠맛과 여운이 남는 선명한 맛이다.

 

3년 동안 더하고, 덜어낸 디저트

다시마 아이스크림은 용호동 시절부터 3년 넘게 이어온 디저트다. 처음에는 캐러멜을 더하는 등 여러 조합을 시도했지만, 오래 다듬는 동안 오히려 구성요소는 단순해졌다. 다시마는 한 번 구워 아이스크림 베이스에 우려낸다. 구우면서 생긴 고소한 향과 감칠맛이 차가운 아이스크림 안에서도 은근하게 드러난다. 노른자로 농도를 내는 앙글레즈 대신 흰자로 만든 머랭 베이스를 사용해 지방감을 줄이고, 질감은 한층 가볍고 폭신하게 만든다. 여기에 다시마와 가쓰오부시 육수로 만든 그라니타와 캐비어를 곁들인다. 그라니타가 녹으며 아이스크림과 섞이고, 캐비어의 염도와 감칠맛이 뒤를 받친다.

김재훈 셰프는 이 디쉬를 두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맛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많은 가니시나 복잡한 조합 없이도 첫맛은 분명하고, 다시마와 가쓰오부시의 감칠맛과 향은 삼킨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익숙한 풍경에서 찾은 재료

긴 타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어릴 때부터 너무 익숙하게 접해와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역과 다시마가 대표적이다. 수없이 먹어온 식재료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니 맛과 쓰임이 새롭게 다가왔다. 현재 팔레트에서는 울산 서생에서 생산한 다시마를 사용하는데, 올해 받은 양만 약 200kg에 이른다. 매장에 모두 보관할 수 없어 일부는 생산자에게 따로 맡겨둘 정도다.

최근에는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동백꽃을 활용한 마카롱도 만들었다. 동백꽃은 부산의 시화이면서도 동백섬이 있는 해운대 일대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의 일부다. 예전에는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들이 음식으로 옮겨지는 순간 전혀 다른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에 김재훈 셰프는 흥미를 느낀다.

그렇다고 이런 요소들을 모아 팔레트를 ‘부산을 표현하는 레스토랑’으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지역성을 하나의 콘셉트로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 안에서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들을 디시로 표현해가고 있다.

 

좋아하는 맛을 계속 만드는 일

2019년 팔레트를 열었을 때 김재훈 셰프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했다. 자신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제대로 내는 것. 세 명이 일하던 작은 식당에서는 그의 취향과 판단이 곧 팔레트의 기준이었다. 지금은 그 맛을 팔레트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고민한다. 궁극적으로는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산에 왔으면 팔레트는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레스토랑이 되길 바란다.

그의 다음 계획은 파인다이닝 만이 아니다. 오는 11월에는 호주식 브런치 카페를 열 예정인 그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국밥집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파인다이닝이든 브런치든 돼지국밥이든, 김재훈 셰프가 결국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에는 그 맛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해진다.

 

단락

Writer 나진실 (Jenny Na)
Editor 이정윤 (Julia Lee)
Photographer Pa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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