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에 자신이 만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즐거움으로 시작한 페이스트리는 이제 맛과 향, 온도와 질감을 통해 한 사람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됐다. 까다로운 디저트 왕국, 프랑스에서 인정받은 김나래 셰프의 이야기.
2023년 11월, 프랑스 미식 가이드 고에미요(Gault&Millau)는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Park Hyatt Paris-Vendôme)의 김나래 셰프를 ‘2024 올해의 파티시에(Pâtissière de l’Année 2024)’로 선정했다. 열다섯 살에 페이스트리를 시작해 괌과 서울, 베트남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그가 파리 미식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알린 순간이었다. 국제 대회에서 기술을 인정받고 여러 나라의 주방을 경험해온 그의 커리어는 이제 파리에서 또 다른 단계에 이르렀다.
파크 하얏트 파리-방돔의 다양한 페이스트리를 총괄하며 작업 중인 김나래 셰프
현재 김 셰프는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의 셰프 파티시에로 호텔 전반의 페이스트리를 총괄한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퓌르(Pur’ – Jean-François Rouquette)의 코스를 마무리하는 플레이티드 디저트부터 카페 잔(Café Jeanne)의 밀푀유와 계절 디저트, 연회와 시즌 컬렉션까지 각각의 공간과 목적에 맞는 페이스트리를 개발하고 완성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다루는 영역은 넓지만 그 중심에 놓인 기준은 일관된다. 모양보다 맛을, 유행보다 계절을 먼저 생각하고 좋은 재료가 가진 성질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리는 것. 한국과 괌, 베트남, 프랑스의 서로 다른 주방에서 쌓은 경험은 이러한 기준을 조금씩 구체화해왔다. 그렇게 축적된 경험 위에서 김 셰프는 맛과 계절을 중심에 두면서도, 사람의 손과 감정이 느껴지는 자신만의 페이스트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파크 하얏트 파리-방돔의 김나래 페이스트리 셰프
나누는 즐거움에서 시작해 파리의 주방을 이끌기까지
김나래 셰프가 페이스트리를 처음 접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제과를 배우며 자신이 만든 빵과 과자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누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고, 새로운 기술을 익힐수록 더 배우고 싶다는 관심이 자연스럽게 진로로 이어졌다. 이후 대학에서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당시에는 제과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식품영양학을 공부한 경험은 이후 재료의 성질과 첨가물을 이해하는 기반이 됐다. 지금도 주재료의 맛이 단맛에 가려지지 않도록 균형을 조절하고 인공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본격적인 호텔 경력은 2011년 하얏트 리젠시 괌 인턴십에서 시작됐다. 이듬해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 코미 파티시에로 입사해 대규모 호텔의 생산 시스템을 익혔고, 2015년 파크 하얏트 사이공으로 옮겨 수셰프를 거쳐 약 6개월 만에 페이스트리 셰프로 승진했다. 서로 다른 기후와 식재료를 경험하며 재료를 보는 관점도 넓어졌다. 베트남에서 접한 현지 커피와 초콜릿의 개성은 훗날 프랑스에서 테루아의 개념을 이해하면서 산지와 환경이 맛에 미치는 영향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파크 하얏트 파리-방돔의 김나래 페이스트리 셰프
사이공은 김 셰프가 파티시에에서 리더로 역할을 확장한 곳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구성원들과 일하며 개인의 기술만큼 팀의 기준을 만들고 생산과 서비스를 조율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익혔다. 동시에 국제 무대에서도 자신의 기술을 검증했다. 2015년 월드셰프(Worldchefs)의 글로벌 페이스트리 셰프 챌린지 아시아 예선에서 우승해 아시아 대표로 선발됐고, 이듬해 그리스에서 열린 세계 결선에서도 우승했다. 호텔 주방에서 쌓은 운영 경험과 대회를 통해 다진 기술은 이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미 파크 하얏트 사이공에서 팀을 이끌고 있던 김 셰프는 2018년 안정된 자리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페이스트리를 직접 경험하고 싶었던 데다, 호텔과 부티크형 페이스트리에 익숙했던 자신이 프랑스의 주방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첫 무대는 쿠슈벨의 팔라스 호텔 슈발 블랑 쿠슈벨(Cheval Blanc Courchevel) 이었다. 이후에는 파리의 파비용 르두아앵(Pavillon Ledoyen)에서 오렐리앙 리부아르(Aurélien Rivoire) 셰프와 일하며 플레이티드 디저트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프랑스에 오기 전까지 김 셰프는 케이크와 피에스 몽테처럼 여러 구성 요소를 미리 준비해 조립하고, 완성된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페이스트리에 익숙했다. 반면 레스토랑의 플레이티드 디저트는 주문이 들어온 뒤 완성되며, 손님이 먹는 순간에 맛과 향, 온도, 질감이 가장 좋은 상태에 이르도록 설계해야 했다. 차갑고 따뜻한 요소, 바삭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한 접시에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기존 작업과 달랐다.
이 차이는 김 셰프가 디저트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넓혔다. 하나의 제품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데서 나아가 서비스 시간과 앞선 요리의 흐름, 손님이 경험하는 순서까지 디저트의 일부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는 데에는 케이크와 초콜릿, 설탕 공예로 다져온 기술과 여러 나라의 주방에서 다양한 재료를 다뤄온 경험이 기반이 됐다. 기존의 기술과 경험 위에 ‘먹는 순간’을 설계하는 감각이 더해지면서 김 셰프의 페이스트리 영역도 한층 넓어졌다. 그가 현재 중요하게 여기는 ‘오감을 사용하는 디저트’라는 기준 역시 이 시기에 구체화됐다.
김나래 셰프는 ‘오감을 사용하는 디저트’라는 기준으로 메뉴를 디자인한다
맛과 계절을 기준으로 호텔의 페이스트리를 이끌다
김 셰프와 장 프랑수아 루케트 셰프의 인연은 파크 하얏트 사이공 개관 10주년 행사에서 시작됐다. 당시 프랑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김 셰프의 목표를 알게 된 루케트 셰프는 그가 쿠슈벨과 파비용 르두아앵에서 경험을 쌓은 뒤인 2021년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 합류를 제안했다.
장-프랑수아 로케트(Jean-François Rouquette) 셰프가 이끄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퓌르(PUR')
현재 김 셰프는 셰프 파티시에로서 퓌르와 카페 잔을 비롯한 호텔 전반의 페이스트리 개발과 생산을 총괄한다. 레스토랑의 플레이티드 디저트부터 카페, 연회와 시즌 컬렉션까지 서로 다른 형태의 페이스트리를 아우르며 메뉴 개발부터 실제 서비스까지 책임진다. 부티크형 제품과 주문 즉시 완성하는 레스토랑 디저트를 한 주방에서 함께 다룰 수 있다는 점은 그가 호텔이라는 환경에서 일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퓌르에서는 장 프랑수아 루케트 셰프의 요리를 이어받아 코스의 마지막을 설계한다. 긴 식사의 끝인 만큼 무게감과 단맛을 조절하고, 제철 재료를 중심으로 향과 온도, 식감에 변화를 준다. 하나의 디저트를 독립적으로 돋보이게 하기보다 앞선 요리의 흐름을 이어받아 한 끼를 완결하는 것이 김 셰프가 퓌르의 디저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할이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퓌르(PUR’)에서 선보인 플레이팅 디저트
김나래 셰프가 페이스트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맛이다. 형태와 기술적 완성도보다 주재료의 맛이 분명하게 드러나는지를 먼저 본다. 여기에 계절성도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제철에 가장 좋은 상태의 재료를 선택하고, 가공 과정에서도 본래의 향과 질감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살리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이러한 기준은 한국과 프랑스에서 재료를 접하며 더욱 구체화됐다. 김 셰프는 한국에서 과일이 계절과 관계없이 유통되고 크기와 모양까지 일정하게 상품화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기억하던 제철 과일의 모습과 차이를 느꼈다고 말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같은 품종이라도 자연스럽게 자란 과일의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른 경우가 흔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의 균일함보다 충분히 익어 제맛을 내는가에 있다. 계절을 단순히 메뉴의 테마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다.
계절감을 담아낸 김나래 셰프의 디저트 메뉴
김 셰프의 페이스트리에는 한국과 괌, 베트남, 프랑스에서 쌓은 경험이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지만, 그는 이를 특정 국가의 스타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밤과 고구마, 베트남에서 접한 커피와 초콜릿, 현재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제철 과일과 허브 모두 필요에 따라 하나의 재료로 선택된다. 한국적인 요소 역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하기보다, 자신이 맛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재료와 기억이 현재의 작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사용한다.
한국적인 요소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업도 있다. 최근에는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에 문을 연 강민구 셰프의 한식 레스토랑 ‘SEOK by Mingoo Kang’과 호텔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고려해 한국 자기에서 착안한 형태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구상했다. 다만 김 셰프에게 한국적 요소는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하는 장치라기보다, 자신이 일하는 장소와 재료, 개인적인 기억이 자연스럽게 맞물릴 때 선택하는 표현에 가깝다.
김나래 셰프의 섬세한 페이스트리 기법을 담아낸 밀푀유(Mille-feuille).
주문 후 조립하는 방식은 생산 효율보다 손님이 먹는 순간의 완성도를 우선하는 김 셰프의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동시에 호텔에서 시그니처 메뉴를 운영하려면 이러한 섬세함을 매일 일정한 수준으로 구현해야 한다. 김 셰프는 팀원들과 조립과 맛의 기준을 공유하며, 개별 디저트의 완성도와 일관된 품질을 함께 유지하는 것 역시 셰프 파티시에의 역할로 보고 있다.
김나래 셰프는 몇 가지 메뉴만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디저트가 각기 다른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만큼 어느 하나에만 자신의 스타일이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을 대표하는 시그니처로는 카페 잔의 밀푀유를 꼽는다.
밀푀유는 페이스트리와 크림의 단순한 구성만큼 재료와 완성 상태가 맛을 좌우하는 프랑스의 고전적인 디저트다. 김 셰프의 밀푀유는 미리 완성해두지 않고 주문이 들어온 뒤 조립한다. 페이스트리의 바삭한 식감과 크림의 질감을 가장 좋은 상태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현재 카페 잔에서 선보이는 밀푀유에는 세 가지 바닐라를 사용한 크림을 넣어, 페이스트리를 가르면 안쪽의 크림이 흘러나오도록 구성했다. 맛과 식감뿐 아니라 시각적인 요소까지 오감을 고려해 완성한 메뉴다.
사람의 손과 감정이 남는 디저트를 만들다
김 셰프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때 특히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표현은 ‘이모션(emotion)’이다. 그의 디저트를 맛본 이들은 정교하게 완성돼 있으면서도 기계적으로 균일한 제품과 달리,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작은 차이와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김 셰프는 이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평가 중 하나로 여긴다. 처음 페이스트리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자신이 만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즐거움이었던 만큼, 기술과 경험이 쌓인 지금도 디저트를 통해 즐거움과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2026년 부활절 시그니처 초콜릿 오브제(ŒUF DE PÂQUES 2026)
최근에는 MBN 〈천하제빵〉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한국의 제과·제빵 현장을 다시 가까이에서 접했다. 프랑스와는 다른 소비 방식과 빠르게 확산되는 유행 등 한국 시장의 특징을 확인하는 한편, 현장에서 활동하는 파티시에와 제빵사의 기술과 개성이 더욱 폭넓게 조명될 필요성도 느꼈다. 프로그램에서도 하나의 기준으로 완성도를 판단하기보다 각자가 어떤 재료와 기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지에 주목했다. 결국 김 셰프가 자신의 디저트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과 타인의 작업에서 발견하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적인 완성도 너머에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남아 있는가 하는 점이다.
파크 하얏트 파리-방돔의 김나래 페이스트리 셰프
오늘의 자리에서 더 나은 파티시에로
김 셰프는 앞으로의 목표를 특정한 장소나 직책에 두기보다, 현재의 자리에서 커리어를 꾸준히 이어가며 더 나은 파티시에로 성장하는 데 두고 있다. 기술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끊임없이 배우고 더 좋은 맛을 탐구하는 동시에,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의 셰프 파티시에로서 팀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자신이 쌓아온 기준과 경험을 구성원들과 공유하며, 개인의 성장을 넘어 팀이 함께 발전하는 주방을 만드는 것이 지금 그가 그리고 있는 다음 단계다.
앞으로 어떤 파티시에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자 그의 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열심히 하는 파티시에.” 열다섯 살에 자신이 만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즐거움으로 시작한 페이스트리는 이제 맛과 향, 온도와 질감을 통해 한 사람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됐다. 여러 나라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이 더해졌지만 출발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좋은 재료와 계절을 바탕으로 가장 좋은 맛을 만드는 것. 김나래 셰프에게 발전은 새로운 이름이나 자리를 얻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을 계속해서 더 정확하게 구현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