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빈 셰프의 ‘마테르’는 뉴 노르딕 퀴진의 철학과 한국 전통 발효, 제철 식재료를 결합해 ‘시간·대지·자연’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는 생산자와의 협업과 실험적 재료 연구를 통해 디시 하나하나를 자연과 사람을 잇는 대화로 확장한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익숙한 한 끼의 시작엔 빛과 땅,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도산공원 옆, 조용한 건물 한편에 자리한 마테르는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이미 특별한 경험이 시작된다. 아직 자연의 숨결이 남아 있는 듯 고요하고 포근한 외벽, 온기와 땅의 결을 품은 계단 손잡이를 잡고 걸음을 내딛다 보면, 강남 한복판임에도 땅속 깊이 다른 세계로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마테르’엔 ‘시간(발효), 대지(제철), 자연의 향기’처럼 레스토랑의 이념과 뜻이 담긴 세 가지 어머니가 자리해 있다. 그리고 김영빈 셰프는 이곳에서 식재료가 품은 진짜 이야기와 삶의 흔적, 자연의 어머니가 남겨 준 깊이를 한 접시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즉 마테르의 요리는 자연과 시간이 어우러져 마음과 마음을 잇는 작은 대화가 되는 것이다.

손님이 레스토랑에 와서 앉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오롯이 자연의 미학에 심취할 수 있는 마테르
어린 손끝에서 시작된 꿈
그의 요리는 어린 시절 자연과 함께 보낸 잔잔한 순간들에서 시작됐다. 풀잎 하나, 흙 냄새, 계절의 기운까지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의 대상이었다. 각각 식품 업계와 조리 연구에 몸담았던 부모님 덕분에 집안 곳곳엔 식재료와 음식 이야기가 가득했고, 식탁 위 풍경은 언제나 새로웠다. ‘이 맛은 어디서 온 걸까?’, ‘저 재료는 어떻게 변신할 수 있을까?’란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움텄을 정도였다.

계단과 벽, 천장의 조형물로 이뤄진 마테르의 공간은 대지의 어머니처럼 섬세하면서도 따뜻하다.
그가 요리로 인한 기쁨을 제대로 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면서부터였다. 파스타와 달걀말이 같은 요리를 손수 만들어 나눠 먹으며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손으로 재료를 고르고, 조심스럽게 불을 켜고,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담았을 때의 설렘.
“아직도 그때 만든 음식이 맛있었다고 친구들이 얘기할 때면, 그 시절의 즐거움이 생생하게 떠올라요”라고 상기 어린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91년생인 김영빈 셰프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2022년 10월, 마테르를 오픈했다.
갈증과 성장의 길목
요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깊어지면서, 그는 더 많은 재료를 경험하고 조리와 관련된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한국조리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또래 친구들과 조리실에서 땀 흘리며 음식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요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시간과 마음이 함께 녹아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중학생 때, 요리사의 길을 걷고 싶다고 처음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자 당시 반응은 엇갈렸다. 할아버지는 장남에게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권하셨고, 반면 부모님은 묵묵하게 응원을 보내며 그의 꿈을 항상 존중하고 지지했다. 이 힘으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더 넓은 세상에서 요리의 본질을 찾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품게 됐다.

흥미로운 조합으로 재료의 새로운 매력을 끌어낸 ‘심해어 술 지게미 다시마’
대학을 다니면서도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실전에 가까운 현장 경험과 다양한 식문화에 대한 갈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마침내 군 복무 중엔 ‘이대로는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진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현실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며, 결국 현장에서 일하면서 직접 배울 수 있는 호주의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를 택해, 셰프가 되기 위한 더 전문적인 교육 과정을 거쳤다.
다음으로 본격적인 실무 수련과 경험을 갖게 된 건 시드니 ‘마스터 다이닝(Master Dining)’에서부터였다. 여기선 꼬미(Commis de cuisine, 주방 조리 보조)부터 수 셰프(Sous Chef, 부주방장)까지 단계별 직책을 차례로 경험하며, 엄격한 주방 구조 가운데 협업, 책임감, 계절과 재료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또 다양한 국적의 셰프들과 교류하며 식재료를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더 넓어지게 됐다.
새로운 도전, 오감으로 경험한 자연과 계절
점차적으로 셰프로서의 자질을 채워가던 그는 요리 이전의 본질에 가까운 ‘자연, 발효, 시간’에 대해서도 깊이 배워 보고 싶었다. 그래서 ‘뉴 노르딕 퀴진(New Nordic Cuisine)’의 선구자로서 전 세계적인 영향력과 혁신적인 철학을 보유한 덴마크 ‘노마(NOMA)’에서 경력을 쌓길 꿈꿨으나, 여러 상황들로 인해 노마의 자매 레스토랑인 ‘108’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다.
‘108’은 자연과 계절, 발효에 대한 실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매일 새벽마다 신선한 산지 재료를 손질하고, 덴마크 곳곳을 누비면서 계절과 자연을 몸으로 부딪히며 배울 수 있었다. 이어 ‘노마 퍼멘테이션 랩(Noma Fermentation Lab)’에선 발효의 기다림과 반복, 수많은 실패와 실험 속에 ‘발효는 곧 시간과 인내’임을 알게 됐다. 더불어 요리는 어느 한순간의 완성품이 아니라, 끝없는 질문과 대화의 과정이란 것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다.
특히 르네 레드제피(René Redzepi) 셰프와 단둘이 나눴던 깊은 대화는 ‘셰프란 자연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란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이는 그만의 자연과 계절, 발효의 철학을 세우는 토대가 됐고, 마테르를 새롭게 오픈해 한국의 식재료와 문화를 접목해가며 또 다른 미식 여정을 펼칠 계기가 됐다.

캐비어와 조개의 감칠맛과 콩의 담백함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콩 조개 캐비어’ 디시
뉴 노르딕 퀴진 철학을 한 차원 더 승화시킨, 아시안 노르딕 퀴진

‘노마(Noma)’ 레스토랑 르네 제드제피 셰프의 영향을 받아 마테르 역시 자연과 발효, 셰프의 스토리텔링을 디시에 담아내고 있다.
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마테르는 국내에선 아직 다소 낯선 ‘아시안 노르딕 키친(Asian Nordic Kitchen)’을 대표하는 유일한 레스토랑이다. 풍부한 해외 경험과 그간 직접 오픈과 운영을 주도한 노하우 덕분에 준비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노르딕 퀴진 특유의 섬세한 연구를 통해 깊은 철학을 고수하려면 많은 인력과 공간이 필요했기에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리 테크닉 이상의 깊은 고민과 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테르는 자연과 시간을 공유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대화는 곧 한 그릇의 음식으로, 계절의 흐름으로, 재료에 깃든 자연의 마음과 이야기로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합니다.”

쌀겨를 직접 입혀 울퉁불퉁하게 거친 흙의 질감이 그대로 보이는 마테르의 벽, 자연주의
마테르는 ‘발효’, ‘제철과 산지’, ‘자연의 섭리’란 셰프의 핵심 가치를 담백하면서도 온화하게 풀어낸다. 여기에 노르딕 퀴진에서 주로 사용하는 젖산 발효와 한국 전통 발효법을 조화롭게 접목해, 발효 과정에서 나타나는 독특하고 다채로운 풍미를 ‘자연이 허락한 시간’의 흔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매주 김영빈 셰프는 각 재료를 공급 받는 농가를 2~3회 차례 방문해 함께 농작물을 수확하고, 이들과 소통을 나누며 조리법을 연구하고, 신선한 제철 채소와 허브, 산나물을 수확해 움트는 계절의 생명력을 다시 디시로 재현해낸다.

농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식재료 본연의 가치를 승화시킨 ‘당근’ 디시
그중 그가 가장 애정을 쏟는 재료 중 하나는 당근으로, 그가 추구하려던 디시의 느낌은 당근의 흙내음은 곱게 덮어두고 갓 뽑아 올린 듯한 싱그러움과 담백한 단맛은 최대한 끌어내, 소박해 보이는 한 접시에서도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내려 했던 것이었다. 실제로 디시에 담긴 당근을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면, 깊은 땅 속을 머금은 듯한 단맛이 먼저 퍼지고, 이어 산자나무의 선명한 산미와 헤즐넛의 고소함이 겹겹이 교차하면서 입안을 향기롭게 채운다.
특히 당근 디시의 조리법은 뉴 노르딕 퀴진의 핵심 정신을 담고 있다. 불필요한 건 덜어내고, 계절의 깊이와 재료의 본질에 집중하는 사고 방식이 바로 그것. 그래서 식재료 하나, 슬라이스 한 장에도 계절과 자연의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무엇보다 당근은 자르는 방식과 익히는 방법에 따라서도 맛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농가와 함께 수없이 논의하며 얇고 일정한 레이어드 커팅법을 완성했다. 얇게 깎아 돌돌 말아냈기에 흡사 당근의 단면처럼 보이기도 하는 디시는 가니시가 더해지면 흙 속에서 막 피어난 꽃처럼 접시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여기에 직접 발효한 산미 있는 소스와 견과류가 더해지면, 신선한 산뜻함이 당근의 자연스러운 단맛을 배가해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해 준다.

천장의 아티스틱한 조형물에서도 김영빈 셰프의 공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재료로 자연, 사람과 소통하는 미학, 미식
마테르에서 유독 인상 깊은 디시 중 하나는 ‘혼마 목살’을 사용한 돼지고기 요리다. 이 부위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주요 단백질 재료로 택하기엔 사실 쉽지 않았지만, 그는 공급자와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돼지 목살을 세밀하게 분리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디시에 맞는 부위를 결국 찾아냈다.
돼지 목살은 원래 경추(목뼈)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넓은 근육을 가리키는데, 그중 네 번째 목뼈 주변에서 갈라져 나온 앞쪽 살은 결이 유독 뚜렷하고 식감이 남달랐다. 일반 목살과 달리 결이 뚜렷해 씹을수록 꼬들한 탄력이 살아나는데 풍미 역시 진했다.

재료 연구를 통해 김영빈 셰프가 원하는 식감과 맛을 구현해낸 ‘혼마 목살(돼지고기)’로 조리한 돼지고기 디시는 마테르의 개성과 매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식재료를 선별하는 과정 중 돼지고기 부위에서 공식 명칭조차 없던 것을 셰프와 공급자(혼고기)가 함께 연구하며 ‘혼마 목살’이라 이름 붙였고, 지금은 이것이 마테르의 상징적인 식재료가 됐다. 결과적으로 이는 김영빈 셰프와 혼고기가 식재료에 대해 함께 파고들어 연구하고 개발하며 발굴해낸 식재료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자와 김영빈 셰프가 함께 고민하며 수확한 비트루트(비트)로, 기존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풍미를 만들어낸 ‘비트루트(beetroot)’ 디시
혼마 목살 외에도 붉은 빛이 선명한 ‘비트루트(beetroot)’ 디시는 마테르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비트루트(비트)는 흔히 흙 맛이 난다는 이유로 쉽게 외면 받는 작물이지만, 서산의 명영식 농부와 꾸준히 소통하며 함께 수확한 건 당도가 무려 16브릭스에 달할 정도로 달콤해 전혀 다른 풍미를 냈다.
이 디시에선 비트루트(비트)를 착즙해 만든 크래커의 안쪽을 비트 크림 소스로 채우는데, 크림 소스는 명이나물과 본 매로우(bone marrow)를 더해 깊이감을 주고, 발효한 버섯으로 만든 캐러멜 소스를 얹어 마무리했다. 이렇게 공들여 완성된 디시를 맛보면 달콤함과 감칠맛, 발효에서 오는 농도가 층층이 느껴져 비트루트(비트)가 가진 새로운 표정을 마주할 수 있다.
이밖에도 본 매로우, 술 지게미, 심해어, 다시마를 활용한 디시들은 대중이 상대적으로 덜 선호하던 재료를 마테르만의 발효와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맛의 층위를 입혔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일련의 코스는 서로 다른 질감과 풍미를 한자리에서 선보이며, 북유럽(노르딕)의 미식 언어와 한국 전통 발효의 시간을 연결해 익숙하지만 색다른 감각과 철학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마테르는 자연과 시간, 사람의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이다. 계절이 바뀌고 재료가 자라나는 과정을 담은 디시 하나하나는 손님과 셰프, 자연이 함께 나누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에서의 한 끼는 시간과 정성, 자연이 어우러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