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꿈을 그려온 조영동 셰프. ‘이스트(Y’east)’는 이러한 꿈의 실현이자, 또 다른 시작이었다.
스케치북에 적던 어린 시절의 꿈부터 성인이 되어 상상한 다양한 미래까지, 이걸 진짜로 실행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서울 미식 씬이 빠르게 성장한 이유 중 하나는 30대에 이른 ‘영 셰프’들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아 연 레스토랑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서로를 자극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자신만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일군 조영동 셰프
그중 ‘이스트(Y’east)’ 조영동 셰프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만드는 오랜 꿈을 품어 왔다. 데이비드 창(David Chang) 셰프의 호주 모모푸쿠 세이보(Momofuku Seiobo)와 덴마크 노마(Noma)의 자매 레스토랑이자, 크리스티안 바우만(Kristian Baumann) 셰프의 ‘108’ 등에서 해외 경험을 쌓으며 이러한 꿈을 구체화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2025년 2월 ‘이스트’를 통해 이를 현실로 완성했다.
오픈 2년 만에 미쉐린 스타를 획득한 ‘이스트’의 외관
이름을 건 레스토랑, 무모한 도전과 끈기로 만든 이야기
언제나 붐비지만 소리 없이 치열한 압구정 로데오 골목길 3층에 자리한 이스트는 오픈 키친 바를 중심으로 셰프와 손님이 마주 앉아, 재료가 요리로 변하는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다.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이 무대는 조영동 셰프의 요리 인생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레스토랑 이름인 ‘이스트(Y’east)’는 그의 이름을 본떠 ‘동쪽을 비추다’란 의미의 영(Y/映), 동(East/東)으로 지어졌지만, 레스토랑이 담으려는 동양적 뿌리를 기반으로 현대적 테크닉으로 재해석한 낯설면서도 친근한 요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호주, 덴마크, 프랑스, 일본 등 다양한 국가에서 경력을 쌓은 조영동 셰프
조영동 셰프의 요리 인생은 사실 평범하게 시작됐다. 20살 무렵 돈가스집에서 설거지를 하다 요리를 배우게 됐고, 직접 만든 음식을 손님에게 내는 순간의 짜릿함이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만든 건 무모하면서도 대담한 그의 성향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시는 그렇게 못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조 셰프는 군 제대 후 본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다니던 대학교를 ‘때려치고’ 전문 학교에 입학했다.
동양적 재료와 서양적 테크닉을 섞되, 완전히 다른 색채를 지닌 ‘이스트’의 디시
이후 파크 하얏트에서 밍글스 김영대 셰프와 인연을 맺으며 기본기를 다졌고, 이 정도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World’s 50 Best Restaurants)’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그는 해외 각지의 미쉐린 레스토랑에 이메일 수십 통을 보냈다.
시드니 ‘모모푸쿠 세이보’ 레스토랑의 영향을 받은 이스트의 오픈 키친에선 다른 곳에선 맛볼 수 없는 아시안 컨템퍼러리 디시를 선보인다.
멜버른 아티카(Attica)의 스타주(Stage, 견습생)로 일하면서 우연히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는 결국 지금의 이스트를 설계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모모푸쿠 세이보’에 입사했고, 이스트의 오픈 키친 바 형태는 이곳에서의 추억에서 따왔다.
“셰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손님과 바로 소통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또 한국엔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또한 대만 타이베이의 ‘로지(Logy)’ 같은 해외 레스토랑의 서비스 방식을 연구하며, 너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구상했다.
장르의 경계를 깨는 새로움 속 익숙함
이스트 시그니처 메뉴, ‘갈비 스톤’
메뉴도 그의 여정을 반영한다. 대표 메뉴 ‘갈비 스톤’은 덴마크 ‘108’에서의 경험이 씨앗이 됐다. “거기서 소꼬리를 도넛 형태로 내던 요리를 보고 한국식으로 하면 되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견습할 때 태운 대파 반죽 기법으로 돌 같은 형태를 완성했고, 처음엔 마라향 돼지고기를 넣어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 손님들에게 호불호가 갈리자 친숙한 갈비찜으로 메인 재료를 재조정했다.
“결국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아야죠. 낯설어도 맛있어야 한다는 게 제 기준이에요.”
익숙한 동양의 맛이 듬뿍 담겼지만, 이스트만의 방법으로 풀어낸 ‘즈마장 누들’
그의 메뉴는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즈마장 누들’은 중화권 향신료인 즈마장(중국식 참깨 소스)을 서양식 파스타 기법으로 풀어낸 디시다. 처음엔 화자오(얼얼하게 매운 맛을 내는 중국 산초의 한 종류)의 강한 향 때문에 파인 다이닝에 어울릴지 고민했지만,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조합을 만들고 싶었다. “‘이건 어디서 본 적 없는 맛이야!’란 반응이 제일 좋아요.”
“사실 서울엔 이미 잘하고 있는 한식 컨템퍼러리 레스토랑이 너무 많아요. 저희가 이 장르를 똑같이 하고 싶진 않았어요. 동양적 재료와 서양적 테크닉을 섞되, 완전히 다른 색을 내고 싶었어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해낸 ‘두부’
전통을 존중하되 결과물은 현대적으로. 두부 메뉴가 대표적이다. “한·중·일 다 쓰는 식재료잖아요. 전통적인 걸 올드하지 않게 모던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가 추구하는 맛의 기준은 단순하다. 먹었을 때 직관적으로 ‘와! 맛있다’란 감탄이 나올 것.
“세심하게 조율된 맛도 좋지만 저는 좀 더 임팩트 있는 맛을 좋아해요. 혀가 지칠 정도로 강하게 가더라도 기억에 남는 맛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 그는 꾸준히 여행을 다닌다. “중화권에 가면 메뉴 아이디어가 제일 잘 나와요. 한국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걸 보기 때문이죠.”
이스트, 그 너머를 향해 가는 길
‘이스트(Y’east)’ 조영동 셰프와 그의 팀원들
하지만 조영동 셰프가 꿈꾸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그는 이스트에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각자 원하는 레스토랑을 차릴 수 있도록 키워 주는 게 가장 큰 목표라고 말한다.
“함께 오랫동안 일한 친구들이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여는 걸 꼭 돕고 싶어요. 그게 제일 큰 꿈이에요.” 물론 이스트 자체를 더 키우고 싶은 마음도 크다. “한국에서 꼭 가야 하는 식당이 되고 싶어요.”
팀원들의 성장을 독려하고 진심으로 지원하는 조영동 셰프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는 ‘완벽한 한 끼’란 무엇일까.
“누구와 먹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게 다르죠. 그리고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느껴져야 해요. 허투루 만든 음식은 정말 싫어요. 가격이 비싸든 싸든, 진심이 담긴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강남 한쪽에서 서서히 변화를 빚어내는 공간. 이스트는 그저 레스토랑이 아니라 셰프의 이야기가 듬뿍 담긴 무대다. 낯설지만 분명히 맛있는, 조영동 셰프가 꿈꾸는 요리가 오늘도 이곳에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