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미쉐린 스타를 지킨 이탈리아 셰프는 한국에서 다시 학생이 되었고, 이제 서울의 식탁에 이탈리아의 요리를 올린다. 새롭게 문을 연 파브리키친에서,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가 지금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서울 압구정 도산공원 인근에 새롭게 문을 연 파브리키친에 들어서자 마치 이탈리아로 이동을 한 것 같다. 오래되고 편안한 이탈리아의 트라토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곳곳에는 파브리치오 페라리(Fabrizio Ferrari), 한국에서 더 익숙한 이름으로는 ‘파브리’가 살아온 시간이 깃들어 있다.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셰프로 살아온 모습까지 그의 개인적인 기억들이 벽을 빼곡히 채운다. 파브리 셰프는, 그가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옛 밀라노의 트라토리아와 할머니의 집을 섞어놓은 듯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압구정 도산공원 인근에 새롭게 문을 연 파브리키친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파브리는 활발하게 활동하며 대중을 만났다. 방송과 유튜브에서 그는 유쾌한 이탈리아인 셰프였고, 대학에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였으며, 때로는 한식과 이탈리아 음식을 연결하는 요리사였다. 서울 용산의 첫 파브리키친 역시 많은 손님을 만난 중요한 무대였는데, 2년간 영업 후 압구정 도산공원 근처로 새롭게 자리를 옮겨 올해 9월 새롭게 오픈했다.
“용산의 첫 파브리키친은 저에게 일종의 실험이었어요. 한국에서 다시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손님들이 제 요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죠. 하지만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더 많았고, 이전을 준비하며 이런 부분을 보완하고 싶었어요.”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는 팀원들이 새로운 파브리키친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그는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표현할 준비가 됐다고 느꼈다. 새 매장은 기획 초기부터 오픈까지 직접 깊이 관여했고, 이전보다 넓어진 주방과 개선된 설비, 커진 팀을 갖췄다. 첫 파브리키친부터 함께했던 박창형 셰프와 오래 이야기만 나눴던 요리들을 실제 메뉴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홀은 황은빈 매니저가 맡았다. 파브리는 좋은 음식만큼이나 사람을 맞이하는 방식이 레스토랑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더 많은 손님을 맞이하면서도 친구를 집에 초대하듯 따뜻하게 대접하고 싶어요. 이번 변화의 중심에는 한층 강해진 주방과 홀의 팀워크가 있습니다.”
파브리키친의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
익숙한 파스타 너머의 이탈리아
새 파브리키친의 메뉴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의도가 보다 선명해진다. 풀리아(Puglia)의 프리셀라(Frisella), 로마의 거리에서 익숙하게 만날 수 있는 수플리(Supplì), 버터와 안초비를 이용한 부로 에 아츄게(Burro e Acciughe), 안초비와 올리브, 토마토, 케이퍼를 사용하는 푸타네스카(Puttanesca), 미트볼을 곁들인 리조토까지 한 지역이나 특정 스타일에 갇히지 않은 음식들이 한 식탁에 어우러지며 서로 다른 지역과 성격의 요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풀리아(Puglia)의 프리셀라(Frisella)를 파브리키친의 방식으로 낸다.
파브리 셰프는 이탈리아 요리도 한국 음식처럼 지역과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지닌 거대한 음식 문화라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피자와 파스타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익숙한 몇 가지 음식이 ‘이탈리아 요리’를 대표해왔기에, 그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음식이 ‘프리셀라’다. 남부 풀리아에서 오래 먹어온 소박한 음식으로, 단단하게 말린 원형 빵을 다시 적셔 토마토와 해산물, 채소 등을 곁들여 먹는다. 지역의 생활과 시간이 어우러진 요리다.
“프리셀라는 지역의 특색이 강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소박한 서민 음식이지만 맛은 아주 직관적이고 진정성이 있어요. 아직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한 접시에 제가 파브리키친에서 보여주고 싶은 이탈리아 요리의 가치가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브리키친의 메뉴는 시즌에 따라 계속 변한다. 지역을 바꾸고 계절을 따라가며 지금까지 한국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음식까지 소개하는 것이다. “언젠가 손님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파브리키친에서 처음 먹었던 음식을 발견하고 직접 주문해본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파브리 셰프의 말처럼,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더 넓은 맛의 지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파브리키친의 다이닝 홀
15년의 별 이후에 남은 것
지금의 캐주얼한 파브리키친만 보고 셰프 파브리의 경력을 처음 접한다면 의외일 수도 있다. 그는 이탈리아 레코(Lecco)의 가족 레스토랑 알 포르티촐로 84(Al Porticciolo 84)에서 오랫동안 주방을 이끌며 약 15년간 미쉐린 스타를 유지했다. 부모가 1984년 문을 연 레스토랑에서 자랐지만 처음부터 요리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고, 졸업 무렵 가족의 일손을 돕다가 뒤늦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규 조리학교 출신은 아니었다. 대신 René Redzepi의 Noma와 Mauro Uliassi의 Uliassi 등 자신이 배우고 싶은 주방을 찾아가 경험을 쌓았다. 알 포르티촐로 84는 2006년 미쉐린 스타를 받았고,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파브리의 요리는 점차 레스토랑의 새로운 정체성이 됐다.
당시부터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재료였다. 오래 거래한 공급자를 통해 좋은 생선을 받고 직접 신선한 채소를 고르는 일을 요리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해산물을 새로운 조리법과 결합하는 실험에도 적극적이었다. 2012년에는 Cous Cous Fest의 이탈리아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해 본선 이탈리아 팀에 합류했고, 2016년 알 포르티촐로 84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최초로 MSC의 지속가능 수산물 인증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셰프 파브리에게 좋은 요리의 기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식재료예요. 좋은 재료는 그 자체로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셰프의 역할은 재료를 과하게 변형해서 놀라움을 주는 것보다 원래 가지고 있는 맛과 매력을 존중하고 가장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것이죠.”
젊은 시절에는 분자요리를 비롯해 새로운 기술과 변형 자체가 흥미로웠다. 파인다이닝의 주방에서 다양한 기술을 익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기술을 덜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 기술은 셰프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료를 더 맛있게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한다. 그렇다고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배운 엄격함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발전하고 완성도를 추구하는 자세”는 지금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달라진 것은 그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다.
“파브리키친을 준비하며 내려놓은 것이 있죠. 요리의 완성도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들어오기 어려웠던 문턱이에요.”
그는 가격과 형식 때문에 제한된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파인다이닝 대신 좋은 재료와 흥미로운 조합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자신을 본 사람도 부담 없이 찾아와 음식을 먹고,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가 그가 꿈꾸는 지금의 공간이다.
생선 뼈와 토마토를 이용한 구아제또(Guazzetto) 소스를 곁들여, 팬에 구워낸 생선 요리. 도미와 삼치, 광어 등 그날 가장 신선한 생선으로 준비하는 파브리키핀의 대표 메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녹아들다
그의 삶이 한국으로 향하게 된 출발점은 의외로 작은 만남이었다. 2010년 무렵 알 포르티촐로 84의 주방에서 함께 일하게 된 한국인 셰프 박성우였다. 당시 파브리가 처음 제대로 접한 고추장과 간장은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감칠맛을 가진 재료였다. 이후 여러 한국인 요리사가 그의 주방을 거쳤고, 그는 밀라노의 한국인 커뮤니티와 교류하면서 김치와 장, 발효 문화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됐다.
셰프 파브리는 고추장을 푸타네스카에 활용하고, 된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산 병아리콩을 발효시켜 해산물에 적용하는 등 한국 음식의 원리를 자신의 조리법 안에서 다시 이해하며 독창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2016년 밀라노에서 열린 한식 요리 경연대회에서 고등어와 무를 이용한 요리로 우승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발 더 한국 문화와 가까워진 계기였다. 이후 2018년 <한식대첩-고수외전>에 이탈리아 대표 셰프로 출연하며 약 세 달간 충청도의 한식 고수 이영숙과 한 팀을 이뤄 도토리묵과 시래기 등 지역의 재료와 전통 조리법을 배웠다. 이후 한국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기회를 얻으며 본격적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수년간 한국을 제 2의 고향으로 삼으며 지낸 시간은 이제 그가 만드는 이탈리아 음식에도 영향을 준다. 핵심은 간장이나 고추장처럼 단편적인 재료가 아니라, 한국에서 함께 음식을 놓고 나누어 먹는 문화 그 자체다. 여러 메뉴를 주문하고 같이 나누어 먹는 한국적인 식사 방법이 그렇다. 그래서 그가 메뉴를 구상할 때, 요리의 완성도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함께 먹는지까지 생각한다. 아주 개인적인 변화도 있다. 가족에게 파스타를 해줄 때 삶는 물의 소금을 예전보다 조금 줄이고 음식의 최종 염도를 더 세심하게 조절하게 됐다.
“그렇다고 제 요리가 덜 이탈리아다워진 것은 아니에요. 한국에서의 경험이 이제 제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거죠.”
파브리키친의 까탈라나 디 감베리 크루디 (Catalana di gamberi crudi). 신선한 단새우에 오렌지, 레몬, 바질 오일을 더한 상큼한 소스와 토마토와 적양파, 올리브오일로 산뜻하게 완성한 카탈루냐 스타일의 해산물 요리다.
섞지 않는 것도 하나의 연결 방식
파브리는 한식과 이탈리아 음식을 연결하는 일을 누구보다 즐겨온 셰프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는 한국인에게도 호불호가 강한 홍어를 선택했다. 홍어의 존재감을 없애는 대신 레몬과 요거트, 튀김이라는 익숙한 기술을 통해 접근 방법을 바꾸고 묵은지와 판체타, 막걸리와 미나리 등을 연결했다. 낯선 재료를 없애기보다는 왜 그 재료를 먹는지 이해한 뒤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새 파브리키친에서 그는 오히려 이탈리아 요리의 정통성과 본질에 더욱 집중한다. “이번 파브리키친의 목표는 한국 손님들에게 이탈리아 요리의 본래 모습과 폭넓은 매력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두 요리를 일부러 섞기보다 이탈리아 음식 자체를 보여드리기로 했어요.”
셰프 파브리는 한식을 배우면서 발효 방식과 낯선 음식에 접근하는 태도, 함께 나눠 먹는 방식에 대해 자신만의 데이터를 쌓았다. 지금 그가 만드는 이탈리아 요리는 한국 재료가 보이지 않아도 20년 전의 이탈리아에서 만들던 음식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한국의 음식 문화, 한국적인 식사 방식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있기에 자신의 본 고장을 더욱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는 관점이다.
파브리키친의 공간을 가득 장식하는 액자를 통해,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의 어린 시절 등 실제로 그가 보낸 시간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다시, 레스토랑
한국에서 그가 널리 알려진 것은 여러 방송 프로그램의 영향이 크다. <한식대첩-고수외전>부터 <백종원 클라쓰>, <장사천재 백사장2>, 그리고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까지. 능숙해진 한국어와 크게 웃는 표정, 새로운 음식을 만나면 망설임 없이 맛보는 모습은 그를 대중에게 친숙한 셰프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매일 문을 열고 손님을 받는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저는 1980년에 태어났고 부모님이 1984년에 레스토랑을 여셨어요. 외동아들인 저는 그곳에서 자랐고 제 삶은 늘 레스토랑과 함께했습니다. 40년 넘게 익숙했던 이 공간은 제게 집과도 같아요. 결국 너무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었던 거죠.” 파브리는 방송과 레스토랑 모두, 음식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은 동시에 수많은 사람에게 요리를 소개할 수 있지만, 레스토랑에서는 손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한 접시를 먹는 순간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설명보다 정확한 피드백이다.
파브리키친의 주방
미쉐린 가이드의 평가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과거 이탈리아에서 15년 동안 미쉐린의 별을 지켜오던 그에게 지금의 생각을 물었다.
“미쉐린 스타와 함께했던 시간은 정말 값지고 자극적인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했어요. 외부 투자자 없이 가족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그 수준을 유지한다는 건 큰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이끌어 가는 셰프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물론 지금도 미쉐린 가이드처럼 요리를 깊이 이해하는 전문가들에게 제 일을 인정받는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누구나 자신의 노력이 전문적인 평가를 통해 인정받으면 보람을 느끼잖아요. 하지만 그것이 레스토랑의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진짜 성공은 손님들이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 설거지하는 곳으로 접시가 깨끗하게 돌아오는 것, 그리고 매달 적자를 내지 않고 레스토랑을 건강하게 운영하는 것입니다.”
파브리키친의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가 직접 구성한 액자
“파브리네 가자”,라고 말할 수 있는 따뜻한 공간
셰프 파브리에게 5년 뒤 계획을 물었다. 그는 압구정의 파브리키친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언젠가는 서울 밖 다른 도시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탈리아 식사의 즐거움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확장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지금 함께 레스토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팀과 오래 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사람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가듯 자연스럽게 ‘파브리네 가자!’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설명처럼, 1년 뒤든 10년 뒤든 그가 원하는 모습은 단순하다.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생각나는 레스토랑, 정성껏 만든 이탈리아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찾는 집, 방문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장소다.
파브리키친의 주방
파브리키친에서 가장 새롭게 보이는 것은, 수많은 경험을 거친 뒤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 답은 오래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좋은 재료, 함께 일하는 사람들, 손님이 깨끗하게 비운 접시, 그리고 다시 찾아오고 싶은 편안한 공간. 다시 자신의 집과 같은 공간에서, 오늘도 소담스러운 이탈리아의 맛이 식탁 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