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대로 55길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바들이 많다. 칵테일 좀 마신다는 사람들에겐 목적지가 되는 곳. 하지만 신동열 바텐더가 원하는 Kiez는 조금 다르다.
서울을 처음 찾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바도 좋지만, 그는 동네 사람이 자꾸 오는 바를 만들고 싶다. 약속 없는 화요일 밤이면 습관처럼 들르고, 친구와 저녁을 먹은 뒤 ‘우리 동네 바’라며 자랑 삼아 한잔하러 오고, 별일 없는 날에도 생각나는 곳. Kiez는 그런 바가 되고 싶다.
위스키 병들 대신 바 백에 나무로 벽에 패턴을 만들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천장을 꾸몄다
바다운 것보다, Kiez다운 것
Kiez에는 ‘바다운 것’을 과시하려는 장치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바 백이다. 보통 칵테일 바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뒤편을 빼곡하게 채운 수백 병의 술이다. Kiez는 바 백을 과감하게 없앴다. 술병 대신 그의 스타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보여주고 싶은 나무로 벽에 패턴을 만들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천장을 꾸몄다.
와일드덕프레스와 함께 만든 공간에는 미드센추리와 바우하우스의 요소가 섞여 있다. 바에서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칠 만큼 가깝게 앉기보다 여유롭게 머무는 걸 선호하는 그의 취향을 반영해 좌석 간격도 넉넉하게 뒀다.
신동열 바텐더가 애정어리게 선택한 조명
“조명은 속눈썹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애정 어린 눈길로 빈티지 조명을 바라보며 건넨 이 비유만으로도 그가 공간을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속눈썹처럼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인상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 그래서 그는 공간의 소재와 빛처럼 얼핏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음악도 한 장르만 틀지 않는다. 하우스를 중심으로 오리엔탈, 아프리칸, 프렌치 신스팝, 1960~80년대 일렉트로닉까지 오간다. 공간의 미감과 음악, 조명만 각각 떼어놓으면 서로 다른 취향처럼 보이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 모두를 합친 ‘전체 경험’이다. 공간, 향, 음악, 칵테일, 서비스까지 Kiez라는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의 목표는 의외로 소박하다.
“여기 좋았다. 내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았다.” 손님이 나가면서 그 정도만 생각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칵테일은 설명보다 맛이 먼저
Kiez의 칵테일에는 되도록 다섯 가지 이상의 재료가 들어가지 않는다. 넣은 재료는 모두 맛에서 존재 이유가 느껴져야 한다. 최근 몇 년 칵테일들이 지나치게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신동열의 생각이다. 기술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재미있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한 잔 안에 점점 더 많은 기법과 재료가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꼭 손님에게 더 맛있는 칵테일을 의미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가끔은 ‘나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어’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손님 입장에서 그게 정말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좋아하는 건 오히려 반대쪽이다.
“맛있으면 끝이에요.”
칵테일 한 잔을 주문하기 위해 긴 설명이 필요한 요즘, 오히려 Kiez는 먹고 마시는 순간 무엇을 의도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칵테일을 만든다.
대표 메뉴인 ‘Rice & Shine’
대표 메뉴인 ‘Rice & Shine’은 누룽지와 메스칼, 코코넛 워터를 사용한다. 고소한 누룽지의 풍미를 마가리타의 구조로 풀어냈다. 이름과 재료를 보고 어느 정도 맛을 상상할 수 있고, 마셨을 때도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지 않는다.
칵테일 ‘Old Fashioned Movie Night’ (좌), 신동열 바텐더가 칵테일과 함께 먹어보길 꼭 추천하는 고구마 크렘브륄레(우)
‘Old Fashioned Movie Night’ 역시 이름부터 어렵지 않다. 버번과 브라운 버터, 옥수수, 메이플 시럽으로 ‘영화를 보는 밤’을 한 잔에 옮겼다. 칵테일은 팝콘과 함께 내어 이름에서 떠올린 장면을 그대로 완성한다. 여기에 일본의 푸드트럭에서 맛본 디저트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고구마 크렘브륄레를 곁들이는 것이 신동열이 가장 추천하는 조합이다.
그렇다고 평면적인 맛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좋은 칵테일의 조건으로 꼽는 것은 ‘레이어드 된 플레이버’다. 향수의 탑 노트와 베이스 노트처럼 첫맛과 끝맛이 다르고, 한 모금 안에서도 여러 풍미가 순서대로 느껴지는 것. 재료의 숫자는 줄이되 맛의 층은 줄이지 않는 셈이다.
이런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서 오히려 재료를 더 잘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재료를 많이 넣어 복잡하게 만드는 것보다 적게 넣고도 부족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메뉴 개발 과정에서도 정답을 혼자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아이디어가 생기면 팀과 함께 만들고 마신다. 주니어 바텐더도 R&D에 참여한다. 누가 아이디어를 냈느냐보다 결과적으로 맛있는지가 중요하다.
바 안의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바
지금의 그는 확고하게 그만의 색을 보여주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런 류의 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그가 생각하는 성공한 바에는 조금 더 명확한 공식이 있었다. 손님이 좌석을 가득 채우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서비스하는 것. 그 생각을 바꾼 곳이 힐즈앤유로파였다.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일하며 이전과 다른 방식의 바를 경험했다. 조금 더 캐주얼하게, 조금 더 친근하게. 바가 얼마나 그럴듯해 보이느냐보다 그 안에 있는 직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즐겁고 편안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좋은 바텐더를 묻는 질문에도 기술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좋은 바텐더는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칵테일을 만드는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사람의 성격까지 트레이닝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다. 술만 많이 알아서도 안 된다. 바탑 너머에는 매일 다른 사람이 앉는다.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태도가 먼저라고 그는 말한다. 아무리 완벽한 칵테일을 내놓아도 그 사람이 불편하면 그 바를 다시는 찾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Kiez 팀
그가 좋은 바의 조건으로 꼽는 것도 비슷하다.
처음 온 사람도 환영받는 바. 그리고 다시 온 사람을 기억하는 바.
Kiez가 말하는 ‘로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목적지가 아니라, 단골의 바
신동열은 두 살 때 가족과 독일로 이민했다. 함부르크에서 자랐고 쾰른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에서 경제를 공부했다. 열아홉 살부터 혼자 생활하며 월세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수업과 병행하기 가장 좋은 일이 바 일이었다. 패션 숍이나 아이스크림 숍에서 일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바로 돌아왔다.
그가 매력을 느낀 것은 칵테일이라는 음료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고른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자신이 만든 한 잔을 손님에게 건네고, 그 반응을 바로 앞에서 보는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아주 짧은 거리에서 에너지를 주고받는 직업이라는 점이 좋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경제학 전공을 살려 제약회사 재무팀에 들어갔다. 하지만 1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130만원을 들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어도 능숙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찜질방에서 지내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일했으며, 이후 혜화의 믹스앤몰트와 푸시풋살롱 등을 거치며 다시 칵테일 바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살 때 독일로 이민해 삶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해온 그는 이 시기 군 복무도 마쳤다. 제대 후 합류한 힐즈앤유로파에서의 2년 반은 그가 바를 바라보는 방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별일 없는 날 생각나는 바 Kiez를 만들고 싶은 신동열 바텐더
내 바를 오픈하겠다는 결심을 서두르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사건도 있었다. 2년 전 어머니를 천국으로 떠나보내고 난 뒤 ‘인생이 생각보다 짧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자신의 바를 열겠다고 생각해왔지만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신동열이 바라는 Kiez의 미래는 꽤 구체적이다. 여행객이 일부러 찾아오는 바도 좋지만, 그보다 이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바처럼 드나드는 곳. 주말이면 놀러 오고, 힘든 날이면 한잔하러 오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문을 여는 곳이다.
유명한 바가 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단골 바가 되는 일은 조금 다르다. 여러 번 찾아온 시간과 그때마다 쌓인 기억이 필요하다. 그래서 Kiez가 기다리는 순간은 어쩌면 아주 평범하다. 특별한 약속도, 마실 이유도 없는 어느 화요일 저녁. 문득 “Kiez 갈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 별일 없는 날 생각나는 바. 신동열이 만들고 싶은 Kiez는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