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청담’은 지난 10년간 독창적인 콘셉트와 한국적 감성을 담은 칵테일을 통해 서울 바 신(Scene)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며, 올해 ‘아시아 50 베스트 바’에선 13위를 달성했다. 박용우 총괄 매니저(헤드 바텐더)는 끊임없는 실험과 셰프들과의 협업을 통해 바와 다이닝의 경계를 허물며, 한국 바 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나가고 있다.
요즘 아시아 미식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서울일 것이다. ‘2025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Asia’s 50 Best Restaurants 2025)’에서 다수의 국내 레스토랑이 상위권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여러 글로벌 다이닝 미디어 및 유수의 해외 미식 평론가도 국내 셰프들과 레스토랑의 잇따른 성과를 주목하며, 한국 미식의 수준과 저력이 국내외적으로 더 널리 알려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흐름이 국내 바 신(Bar Scene)으로도 이어지고 있단 것이다.
입구부터 테이블까지 현실을 잠시 잊고 물 흐르듯 서비스를 즐길 수 있도록 세팅된 ‘앨리스 청담’의 공간
특히 제스트(Zest), 바 참(Bar Charm), 앨리스 청담(Alice Cheongdam), 르챔버(Le Chamber), 이 네 곳은 ‘2025년 아시아 50 베스트 바(Asia’s 50 Best Bars 2025)’에서 각각 2위, 6위, 13위, 50위에 오르며 한국 바 문화의 존재감을 또렷이 각인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한 순위 상승이 아니라, ‘한국적 감각’ 이 하나의 장르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단 사실이다. 싱가포르의 정제된 완성도, 홍콩의 세련된 서비스, 방콕의 화려한 리듬 사이에서 서울은 전혀 다른 결을 내세운 ‘감정의 깊이’로 각광받고 있다.
‘앨리스 청담’을 대표하는 4종 칵테일, 왼쪽부터 ‘E=mc²’, ‘보르도 마티니’, ‘오키 독’, ‘히피티 호피티’
그중 ‘아시아 50 베스트 바(Asia’s 50 Best Bars)’가 런칭된 이래, 2016년부터 지난 10년 간 단 한 번도 리스트에서 빠진 적 없는 ‘앨리스 청담(Alice Cheongdam)’이 있다. 이곳은 한국 바 문화의 중심이자 수많은 바텐더를 배출해 온 산실로서, 국내 바 트렌드의 변화를 리드하며 탄탄하고 균형 잡힌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스피크이지 그리고 앨리스의 토끼굴
붐비는 청담동 한편, 온도차가 있는 공기를 지나 회색 계단 아래로 들어서면 은은한 생화 향과 함께 플라워 숍처럼 꾸며진 입구가 손님을 맞이한다. 이어 문을 연 순간,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찬찬히 뒤섞인다. 미국 금주법 시대에 비밀리에 운영되던 ‘스피크이지(Speakeasy) 바’ 컨셉에 맞춰 청담동 뒷골목에 작게 숨은 국내 대표 칵테일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서사를 재해석해 전 공간을 세팅했다.
바의 컨셉에 맞게 여기저기 숨어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캐릭터를 찾아 볼 수 있다.
입구 구조는 철저히 계산된 연출이다. 꽃집을 거쳐 들어가는 동선, 낮은 조명, 미묘하게 달라지는 온도와 향. 이 모든 것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곳을 이끄는 박용우 총괄 매니저의 첫마디는 심플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든, 이 안에선 누구나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여성 바텐더가 4명이나 상주하는 앨리스는 팀의 화목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손님에게 전한다.
화려한 수사는 없었지만, 이 말엔 오랜 시간 바를 지켜온 사람만의 단단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처럼 손님들은 문턱을 넘는 순간, 바 앨리스 안에서 바텐더들이 전해 주는 칵테일 한 잔에 서서히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낯선 세계로 잠시 옮겨 간다.
커튼 재질부터 조도까지 세심히 신경 쓴 앨리스에선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자유롭게 드링크를 즐길 수 있다.
앨리스 청담은 이야기로 설계돼 있다. 좁은 계단은 토끼굴을 상징하고, 미세하게 기울어진 조명과 향의 농도, 손끝으로 느껴지는 벽의 질감까지 모두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이곳의 무드와 하나가 되면, 어느새 외부의 소음은 사라지고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바 곳곳엔 토끼와 고양이처럼 이야기 속 인물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놓여 있는데, 정작 주인공인 ‘앨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앨리스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앨리스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손님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가 아니라, 그 안을 걸어 다니는 주인공이 된다. ‘앨리스 바’는 그렇게, 각자의 이상한 나라를 위한 판타지 무대가 된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넘어선 매직 포션
손님 앞에 놓이는 메뉴북은 한 권의 이야기책처럼 구성돼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동화 속 장면 같은 칵테일 모티프 삽화를 칵테일 메뉴명과 함께 챕터 제목처럼 만날 수 있다. 이때 손님은 자연스럽게 물을 수 밖에 없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바로 이 질문이 앨리스에서의 첫 주문이자 대화의 시작을 연다.
순수하고 기발한 상상력 아래 도전적인 의미를 지닌 칵테일, ‘E=mc²’은 앨리스의 캐릭터와 닮아 있다.
메뉴북의 첫 페이지에 적혀 있듯, 앨리스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드링크 한 잔에 담아낸다. 박용우 총괄 매니저의 창작은 늘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이건 뭘까?”란 질문이 “이건 어떤 이야기일까?”로, 그리고 결국 “이건 어떤 맛일까?”로 이어진다. 그는 상상력을 손끝의 언어로 바꾸고, 바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쉼’을 이끌어낸다.
전기를 맛으로 표현한 ‘E=mc²’은 신맛의 떨림과 미세한 긴장을 전류의 감각으로 환원한 칵테일이다. 감전된 듯 순간적으로 퍼지는 산미와 전기가 흐르는 잔의 시각적 연출은 ‘이상한 나라에선 전기도 마실 수 있다’는 바의 철학을 완벽히 구현한다.
매 시즌 한국적인 칵테일을 선보이는 앨리스. 이번 시즌엔 기순도 딸기 고추장을 활용해 음료를 만든 다음 장독 모양 글라스에 담아 쌈장 튀일을 올려 서빙한다.
그의 칵테일은 언제나 이야기로 시작해 맛으로 끝난다. ‘된장 버터 칵테일’은 백종원 셰프가 춘장을 볶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브라운 버터에 된장을 튀겨 감칠맛을 입힌 술이다. 고소함과 염도의 경계 위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섬세함이 특히 일품이다. 한편 지난 시즌의 ‘쌈 칵테일’은 깻잎과 상추, 아보카도를 소주와 섞고 김치 타임 파우더로 마무리해, 한국적인 식문화의 구조를 술로 제대로 번역해냈다.
음료를 더 맛있게, 또 적절한 온도에서 마실수 있게, 음료를 마시는 방법까지 디자인한 ‘보르도 마티니’
이번 시즌 대표작 ‘오키 독(Okie Dok)’은 기순도 명인의 딸기 고추장을 베이스로, 구운 쌀 소주와 참기름 파우더를 더해 한식의 매운맛을 부드럽게 조율했다. 마법은 “딸기 고추장이 뭐야?” 하고 묻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 박용우 총괄 매니저의 칵테일 세계는 맛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창의력과 세밀한 기술, 컨셉트에 어울리는 기물의 조화로 완성된다. 그는 이에 대해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글라스에 손이 닿는 순간, 칵테일에 흐르는 전류를 볼 수 있는 ‘E=mc²’
세상에 없는 맛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의 실험은 때론 색과 맛을 연결하는 상상으로, 때론 기술적 완성으로 이어진다. 일례로 그는 테트리스의 색감을 맛으로 치환해, 과일로 블록을 쌓듯 조합한 칵테일을 ‘푸르트리스(Frutris)’라고 이름 붙였다.
그중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기법은 ‘밀크 워시(Milk Wash)’다. 우유를 넣어 유청으로 분리시키는 오래된 기술이지만, 그는 이를 통해 알코올의 각을 다듬고, 맛의 균형과 부드러움을 완성한다. 또한 이 기법은 꽤 큰 규모의 업장에서도 안정적인 맛을 유지할 수 있어,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앨리스의 시그니처 칵테일 ‘히피티 호피티’. 시즌에 따라 드링크 레시피는 변경되지만 깜찍한 글라스는 바뀌지 않는다.
기물을 잘 사용한 대표적인 예는 앨리스의 시그니처 칵테일이자 심볼인 ‘히피티 호피티(Hippity Hoppity)’다. 토끼 모양의 머그에 매 시즌 다른 칵테일을 담아 ‘시간의 변주’를 표현한다. 특히 이번 시즌엔 루콜라와 딜, 파슬리를 사용해 복합적인 허브 향의 여운을 남기도록 했다.
글라스, 기물, 마시는 방법까지 바텐더들의 섬세한 전략에 따라 서비스되는 앨리스의 칵테일
또 다른 실험작 ‘보르도 마티니(Bordeaux Martini)’는 와인을 증류해 만든 무알코올 베이스 음료와 투명 유리잔의 구조로 완성됐다. 첫 모금은 날카롭고 마지막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마시는 방법까지 디자인하는 거예요”란 그의 이야기에, 그간 시도해온 다양한 콜라보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의 조율
최근 국내 F&B 신에선 다양한 협업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바와 레스토랑이 함께 ‘드링크’까지 철저히 설계하는 콜라보다.
앨리스 역시 빈호와 타이안 테이블, 그리고 쵸이닷 최현석 셰프와의 마카오 카지노 디너 등 다양한 협업을 통해 바와 다이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선보여왔다. 박용우 총괄 매니저는 수많은 셰프들과의 협업 속에서 음식과 술이 대화하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셰프와 소믈리에의 중간 지점에서 최고의 맛을 끌어내려 노력하는 박용우 총괄 매니저
그는 “음료는 기본적으로 디저트의 언어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다이닝에 어울리게 하려면 당을 줄이고, 질감이나 온도, 여운으로 대화를 만들어야 하죠”라고 설명한다.
자신을 “셰프와 소믈리에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라 칭하는 그는, 음식과 술의 관계를 ‘1+1’로 계산하지 않고 감정의 조율이라 생각한다. 술이 음식의 결을 따라가기도 하고, 때론 음식이 술의 향을 닮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1+1이 2를 넘어서는 순간”은 바로 이 교차점에서 나타난다.
앨리스 그리고 한국 바 신의 미래
이렇듯 앨리스 그리고 박용우 총괄 매니저의 끊임없는 실험과 탐구, 그리고 드링크에 담긴 서사는 ‘앨리스 청담’을 지난 10년 간 글로벌 무대의 중심에 있게 했다. 특히 올해 앨리스는 ‘2025년 아시아 50 베스트 바(Asia’s 50 Best Bars 2025)’ 13위, ‘니카 하이스트 클라이머 어워드(Nikka Highest Climber Award)’ 등을 동시에 받으며 큰 쾌거를 이뤘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쌓아온 세계관의 내실이 국내외 손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국내 바 신의 기틀을 다져온 1세대 바들에 이어 2세대 바들 또한 점점 더 스펙트럼을 넓히며, 다채로우면서도 두텁게 팬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국내 바 신(Bar Scene)의 현재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아직 소주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요즘은 많이 바뀌고 있어요. 오히려 저희가 맡은 영역을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처럼, 이제 국내 바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세대 바이자 한국 바 신의 기틀을 다진 ‘르챔버(Le Chamber)’와 ‘앨리스 청담(Alice Cheongdam)’에 이어 ‘제스트(ZEST)’, ‘공간 바(Gonggan Bar’), ‘파인앤코(Pine & Co)’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2세대 바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울의 밤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 “앨리스는 하나의 바 이상으로, 바텐더를 위한 배움의 장이자 우리나라 바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고 작은 바람을 밝혔다.
박용우 총괄 매니저는 바 신을 넘어 국내외 다양한 레스토랑과 장르를 넘나드는 콜라보를 활발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래왔듯, ‘앨리스’에서 배우고 경험을 채운 바텐더들은 각자의 스타일로 한국의 바 문화를 확장해가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대표 바텐더로서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 그 시간을 어떻게 쌓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화기애애하기로 소문난 ‘앨리스 청담’의 팀워크. 이들은 동료이자 식구로서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1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바에서 선배들을 보고 배우며 자라온 자신과 앨리스의 역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야기하는 ‘여운이 긴 맛’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