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위 서해안 윤슬 속 태안의 생명력, 김성운 셰프

태안의 떼루아를 원형 이상으로 담아내는 ‘테이블포포’는 ‘태안 파인 다이닝’이란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가고 있다.

김성운 셰프가 지휘하는 ‘테이블포포(Table for Four)’는 10년 넘게 머물던 서래마을 시대를 뒤로하고 한남동에서 두 번째 챕터를 맞이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여전히 ‘팜투테이블(Farm to Table)’과 ‘로컬(local)’이란 깃발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흑백 요리사 2> 출연 후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그는 결코 부유하지 않는다. 새로운 콘셉트로 자신을 포장하기보다, 그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고향 태안의 흙내음과 해풍, 갯벌의 시간을 접시 위에 정직하게 담아낼 뿐이다.

서해안 윤슬 그리고 태안의 풍광을 떠올리게 하는 테이블포포 한편의 커다란 통창

테이블포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이다. 커다란 창을 투과한 눈부신 채광이 정교하게 빚은 테이블 웨어 위에 잘게 부서지면서, 서해안의 잔잔한 파도 위에 내려앉은 윤슬을 연상케 한다.

모던해진 공간, 자연으로 더 가까이 회귀한 디시

한남동으로의 이전은 테이블포포와 김성운 셰프에게 그저 장소가 바뀐 것이 아닌, 그 이상을 의미한다. 먼저 강남과 강북의 다이닝 문화가 다르듯, 이곳을 찾는 고객층 역시 기존 5060세대에서 3040세대로 한층 젊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갤러리처럼 세련되게 진화한 공간과 요리의 방향성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대비다.

테이블포포에선 살아 숨쉬는 태안의 자연을 그대로 머금고 향유할 수 있다. 

“방송을 보고 ‘팬’이 되어 찾아왔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분들을 마주하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있죠. 한남동에 새로이 정착한 건 단순한 확장이 아닙니다. 라운지가 생겨 서비스할 수 있는 객수가 4명 남짓 늘어난 걸 확장이라 부르긴 애매하니까요. 하지만 요리 내적인 관점으로 보면 완벽한 업그레이드를 이뤘습니다. 무엇보다 서래마을 시절의 접시를 모두 비워내고 테이블 웨어를 다시 디자인하며 공간에도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주었죠.”

온기로 가득한 테이블 세팅에서 김성운 셰프만의 소울과 바이브가 느껴진다. 

분위기는 한층 모던해지고 기물은 화려해졌지만, 그 위에 오르는 요리는 오히려 기교를 더 덜어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더 깊고, 투박하며, 내추럴한 태안의 본질을 향해 나아갔다.

“공간은 세련되게 바뀌었지만, 음식은 조금 더 태안적인 느낌을 짙게 담고 있습니다. 더 내추럴하고, 때로는 시골스럽게요. 현지 음식에 녹아 있는 요소와 투박한 양념들을 양식의 기법으로 섬세하게 변형하고 재조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로컬이 아닌, 떼루아적 관점의 해석 

지역 식재료를 활용하는 로컬 푸드는 이제 다이닝 씬에선 기본값이 됐다. 젊은 셰프들은 앞다투어 특별한 지역 농산물을 찾고 메뉴에 스토리를 부여한다. 국내 다이닝 씬에서 로컬의 개념을 가장 먼저 치열하게 개척해 온 김성운 셰프에게 요즘의 분위기는 어떻게 읽힐까.

눈부신 채광에 화사하게 반짝이는 테이블포포의 공간

“요리사들이 ‘로컬’을 외치기 전에 이 식재료가 언제 심어져 어떻게 자라나는지 이들의 시간을 먼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마늘과 양파가 해를 넘겨 자라는 작물이라는 걸 아는 셰프가 얼마나 될까요? 상추나 부추처럼 봄에 심어 한두 달 만에 쑥쑥 뽑아 먹는 작물과 9월에 심어 혹독한 겨울의 언 땅을 견뎌내고 이듬해에 수확하는 작물은 품고 있는 생명력 자체가 다릅니다. 감자 하나를 쓰더라도 고랭지인지, 평지인지, 하우스인지 재배 방식과 출하 시기를 꿰뚫고 있어야 하죠. 아랫지방에선 벌써 하우스 햇감자가 출하되지만, 태안은 아직 씨감자조차 심지 않은 시기이거든요.”

식재료,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플레이팅에도 떼루아의 시간과 정성을 더하고, 자신만의 감각을 쌓아올리는 김성운 셰프 

각 지역에서 나고 자라는 농수산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지역 이름만 가져다 쓰는 건 ‘보여주기식 로컬’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뼈 있는 지론이다.

“단순히 지역에서 난 것을 사다 쓴다고 로컬 푸드를 요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얼마나 지역을 충실히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제가 자란 태안의 황토밭에서 자란 농산물들은 흔히 말하는 ‘때깔’부터가 다릅니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진흙과는 토질 자체가 다르죠. 거친 해풍을 온몸으로 맞고 자란 쌀, 해풍에 반건조한 생선들은 디시에서 미묘하고 압도적인 맛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지역의 흙과 바람, 그리고 생산자의 노고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로컬의 시작입니다.”

태안 로컬 푸드를 진정성 있게 다루는 그의 손끝에서 ‘태안 파인 다이닝’이란 장르가 탄생한다. 

그의 요리적 뼈대는 프렌치와 이탤리언 퀴진에 있지만, 지금의 테이블포포를 그저 ‘유러피언 다이닝’이란 카테고리에 묶어두기엔 한계가 있다. 서양 요리의 견고한 구조 안에 자신이 발을 딛고 선 태안의 역사와 정체성을 제대로 결합해냈기 때문이다.

동백 기름과 유자 드레싱을 곁들인 ‘고등어와 대방어 세비체’

“어릴 적부터 이탤리언을 베이스로 요리해 왔지만, 지금 저의 장르를 굳이 정의하자면 ‘코리안 컨템퍼러리 이탤리언’ 혹은 ‘태안스러운 새로운 서양식’이라 부르는 게 맞을 겁니다. 일본의 ‘재패니즈 이탤리언’이 훌륭한 미식 장르로 자리 잡았듯, 저도 한국의 로컬 요소를 이탤리언 문법에 녹여냅니다. 엔초비 대신 멸치 액젓을 쓰고, 삭힌 게국지를 이용해 파스타를 만드는 식이죠.”

‘태안스러운 새로운 서양식’ 장르를 만들고 또 개척해 나가는 그의 주방 

그는 영감의 시작과 끝을 발견하려 주방 안에만 머물진 않는다. 고향의 향토 음식을 서양식화하는 작업을 넘어, 틈날 때마다 태안의 박물관과 안흥산성, 석구암 등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지역의 문화와 숨결을 자신의 요리 철학으로 가다듬고 있다.

태안 쭈꾸미, 문어 라구로 속을 채운 ‘태안 감자 까넬로니’

그가 내놓는 시그니처 메뉴들 역시 이러한 철학의 정수를 드러낸다. 이탈리아 전통 문어 감자 요리에서 착안한 디시 ‘태안 감자 까넬로니’는 태안산 감자로 만든 까넬로니 면을 얇게 편 다음 라비올리처럼 문어 라구로 속을 채우고, 숯불에 구운 태안 봄 쭈꾸미를 곁들여 파인 다이닝 스타일의 섬세한 터치를 입혔다. 

태안 당근 퓌레와 가로림만 생감태, 농축 육즙 소스인 송아지 쥬(veal jus)와 트러플을 곁들인 ‘한우 등심 구이’

메인 디시인 한우 등심엔 태안 농장에서 직접 기른 당근으로 퓌레를 만들고, 오직 가로림만 일대(충남 서산과 태안 사이에 있는 반폐쇄성 내만으로, 국내 최대 갯벌이 자리함)에서만 채취되는 귀하디 귀한 태안 생감태를 매칭했다. 서양의 조리 기법과 태안의 영혼이 한 플레이트 위에서 조화를 이루는 디시다.

세련된 다이닝 곁에 피어난 갯벌의 날것, ‘포차포포’

파인 다이닝을 추구하지만 그의 영혼 밑바탕은 늘 태안 바닷가에 머물러 있다. 한남동과 멀지 않은 옥수동에 자리 잡은 세컨드 브랜드 ‘포차포포’는 격식을 덜어내고, 직관적이고 포근한 태안의 맛을 구현해낸 그만의 또 다른 캔버스다. 태안 학암포 포장마차에서 영감을 받은 ‘포차포포’는 서울 한복판에 시골 포장마차를 통째로 떼어다 놓은 듯 꾸밈없는 날것의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공간이다.

태안 식재료 산지 생산자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늘 최상급으로 신선한 식재료를 받을 수 있는 그는 최근 ‘포차포포’도 오픈했다. 

“진짜 현지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요리로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아무리 식당의 오랜 단골이라 한들 포장마차 이모님이 직접 담근 굴김치를 택배로 올려 보내주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오랫동안 현지 분들과 끈끈한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하죠. 또 태안 양식장에서 갓 채취한 생김을 서울로 올려 받아 탕을 끓이고 전으로 부쳐냅니다. 서울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진귀한 맛이죠.”

그는 태안이 가진 매력으로 광활한 갯벌을 꼽는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이란 이탈리아 지형처럼 길쭉한 바닷길이 만들어내는 풍요로움 속에서 갯벌이 품은 강렬한 생명력을 담은 식재료들을 매일 같이 서울에서 직접 받고 있다.

테이블포포는 태안이 품은 라이브한 매력을 생동감 넘치는 디시로 옮기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해’라고 하면 그저 뻘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갯벌이 있어야만 잉태되는 고귀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황금게, 물텀벙이, 뻘낙지, 쭈꾸미가 대표적이죠. 태안 사람들은 쏙(뻥설게)을 부를 때 ‘그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들이 ‘야, 그이 가져와!’ 하던 그 향토적인 정서와 식재료를 저는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서울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물텀벙이 매운탕’ 같은 태안만의 짙은 향토 음식이 포차포포의 무기입니다. 동해나 남해에선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서해 갯벌만의 독보적인 떼루아(Terroir)죠.”

접시 위로 닥친 기후 위기, 자연의 시계를 읽는 요리사 

1년 내내 태안의 밭과 바다를 주시하는 그는 주방에서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나날이 체감하고 있다. 자연의 시계가 무섭도록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간을 앞서 읽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태계의 찰나를 늘 요리로 번역해내는 김성운 셰프

“농산물의 출하 시기가 갈수록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예전엔 4월이나 되어야 심던 감자를 요즘은 날이 따뜻해져 3월에 심습니다. 원래는 3월에 감자를 심는다는 생각조차 못했었죠. 5월에나 심던 고추도 4월 초에 다 심어버립니다.” 

“바다의 상황은 더 심각해요. 5월이나 되어야 살이 오르던 바지락이 4월부터 이미 살이 꽉 차 있고, 나오지도 않아야 할 시기에 암대하가 잡힙니다. 심지어 작년엔 11월이면 자취를 감춰야 할 꽃게가 12월 말까지 수족관에 살아 있었어요. 수온이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졌다는 명백한 증거죠.”

테이블포포 주방에선 자연의 시간과 흐름, 변화에 순응하며, 태안의 아이덴티티를 담아내는 데 더욱더 매진한다. 

지구의 온도가 바뀌면 셰프의 접시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태계의 찰나를 요리로 번역 혹은 직역해 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미쉐린을 향한 여정, ‘파스타 포포’의 꿈 그리고…

한남동으로 이전한 지 1년, 테이블포포는 새로운 상권과 한층 젊어진 고객들의 입맛, 그리고 낯선 공간의 공기에 적응하며 예열을 마쳤다.

“바로 작년이 새로운 동네와 고객층, 달라진 주방 동선에 적응하며 밭을 일구는 시기였다면, 올해부터는 그동안 탄탄하게 다져놓은 준비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결실을 맺어볼 생각입니다.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서비스, 그리고 완벽한 퀄리티의 음식을 통해 다시 한 번 별을 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흑백 요리사 시즌 2> 출연에 이어 미쉐린 1스타 재탈환을 꿈꾸는 김성운 셰프

인터뷰 내내 요리와 식재료에 대해 진중하게 이야기하던 그는, 언젠가 미래에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을 묻자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것은 거창한 다이닝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의 본질적인 즐거움으로 회귀하는 일이었다.

“지난날 없어졌던 <파스타 포포>를 다시 오픈하고 싶습니다. 여러 업장을 관리하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요. 저는 주방에서 직접 파스타 면을 말아낼 때 요리사로서 가장 큰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든요. 영화 ⟪더 메뉴(The Menu)⟫ 에서 외딴 섬에서 손님들을 가둬놓고 기괴한 요리를 내던 그 무시무시한 파인 다이닝 셰프도, 결국 마지막엔 자신이 어릴 적 굽던 평범한 치즈 버거를 만들 때 가장 순수하게 행복해 하잖아요. 저에겐 그게 바로 파스타를 마는 일입니다.”

명실공히 후배 셰프들에게 가장 존경 받고 사랑 받는, 진짜 선배답고 어른다운 김성운 셰프

20년 가까운 세월을 오너 셰프이자 주방의 리더로 분투하며, 그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덕목은 ‘나눔’과 ‘연대’다. ‘사라우츠’의 최경훈 셰프, ‘리베르떼’의 이우규 셰프, ‘오리지널 넘버스’의 이찬양 셰프 등 숱한 후배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셰프로 꼽을 뿐 아니라, ‘파인 다이닝’이란 치열하고 폐쇄적인 업계에서 이례적일 만큼 후배들에게 유독 관대한 선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의 가장 막강한 무기 중 하나는 인맥입니다. 제 밑에서 고생하며 일했던 후배 셰프들이 단단하게 성장해서 다시 자신만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돕는 것이 선배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함께 태안에 내려가 땀 흘려 농사를 짓기도 하고, 귀하고 좋은 재료가 있으면 아낌없이 후배들의 업장으로 내어줍니다. 이렇게 쌓인 인연과 연대가 결국 모두를 튼튼하게 지탱해 주니까요.”

태안의 아름다움을 손님의 마음과 감성에 닿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테이블포포 

그가 오너 셰프로서 가장 가슴 벅찬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손님들이 제 요리를 드시고 ‘마치 태안으로 훌쩍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다’, ‘좋은 식재료 덕분에 몸이 건강하게 치유 받는 느낌이다’라고 말씀해 주실 때가 가장 좋습니다. 실제로 저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시고 영감을 받아 그 길로 태안 여행을 다녀오셨다는 분들도 적지 않고요. 셰프인 제가 의도했던 태안의 아름다움이 손님들의 마음속에 온전히 닿았을 때, 요리사로서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유행은 변해도 흙과 바다가 빚어낸 자연의 맛은 영원하다. 한남동의 눈부신 채광 아래, 더욱 짙고 단단해진 김성운 셰프의 요리가 다시 한 번 막을 올렸다.

한남동 이전 후 더 깊고 너른 꿈을 꾸게 되었다는 김성운 셰프의 모습에서 서해안의 풍광이 오버랩된다. 

단락

Writer 장준우(Jun-woo Jang) 셰프
Editor 전채련(Chaeryeon June)
Photographer 정준택(Joon-taek Jeong)_ Fun & Benefit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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