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시의 흰 도화지 같은 접시 위에, 전통적인 일본 요리의 절제와 최성훈 셰프의 현대적인 표현이 맞물리며 특별한 풍경이 담긴다.
하쿠시(白紙/はくし)는 일본어로 ‘흰 도화지’를 뜻한다. 빈 종이 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의미로, 최성훈 셰프가 긴 수련의 시간을 견뎌낸 뒤 자신의 세계를 펼쳐낸다. 접시 위에는 최 셰프가 일본, 호주, 홍콩, 마카오, 런던 등 여러 도시의 주방을 거치며 쌓아 온 경험과, 그 경험을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두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매일의 접시 위에 새롭게 무언가를 그려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다.
2025년 압구정으로 이전한, 하쿠시의 세 번째 공간
숯불을 중심에 둔 모던 와쇼쿠
2018년 신사동에 처음 문을 연 하쿠시는 숯불을 중심에 둔 일식 레스토랑으로 출발했다. 당시 최성훈 셰프는 해외에서 10년 이상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전통 조리 방식과 현대적인 재료 선택, 자유로운 플레이팅을 결합한 요리를 선보였다. 숯불이 주는 원초적인 향과 온도, 재료가 익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즐거움, 그리고 식사는 셰프의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관점으로, 그는 하쿠시에 볼거리와 재밋거리, 즐길 거리가 겹쳐진 하나의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긴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면 다른 공간에 들어왔다는 느낌, 휴양지에서 음악과 요리를 함께 즐기는 듯한 편안함, 그리고 숯불 앞에서 요리가 완성되는 장면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오감으로 전달된다. 초기 하쿠시의 핵심은 이처럼 불과 향, 음악과 조리 장면이 겹쳐진 공간으로 들어오는 듯한 감각의 전환에 있었다.
첫 번째 하쿠시는 단품과 코스 메뉴가 함께 준비되는 비교적 캐주얼한 재패니즈 다이닝의 에너지와 숯불의 생동감을 품고 있었다면, 2022년도 한남동으로 이전한 뒤의 하쿠시는 ‘숯과 불, 도화지’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더욱 선명한 공간적 경험으로 치환시켰다. 블랙과 레드의 강렬한 색감은 숯과 불을 연상시켰고, 그 사이에 놓인 화이트 컬러는 하쿠시라는 이름이 가진 흰 도화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셰프의 생각과 철학이 더욱 선명해진 공간에서 그는 모던과 클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맛과 향을 보여주며, 서울 미식 신에 자리잡았다.
2025년도 하쿠시는 압구정으로 이전했다. 계절의 변화가 통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아담하고 모던한 이 레스토랑에서 최성훈 셰프는 보다 진보한 요리를 선보이며, 2026년 미쉐린 가이드에 새로운 1스타 레스토랑으로 등재됐다. 코스와 단품을 모두 운영하며, 늦은 시간에는 기존 시그니처 메뉴를 중심으로 한 코스나 단품 메뉴를 즐길 수 있다. 파인다이닝의 집중도와 갓포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한다. 식재료와 일식 조리법의 전통을 충실히 이해하면서도 독창적인 위트와 감각을 더해 펼쳐내는 최성훈 셰프의 요리는 지난 8년 이상 서울에서 발전하며 진화해 온 하쿠시의 관점을 설명하는 듯하다.
하쿠시의 테이블 세팅(좌), 일본식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기물(우)
세 번째 하쿠시, 그리고 팀
압구정으로 이전하며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최성훈 셰프가 가장 먼저 이야기한 변화는 인테리어나 메뉴가 아니었다. 바로 '팀'이다. 신사동과 한남동 시절에는 최성훈 셰프가 거의 모든 결정을 내렸다. 요리와 서비스, 운영과 방향성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일인 다역을 자처했지만, 지금은 소믈리에와 주방팀, 브랜딩 이사까지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팀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조직이다. 두 번째 하쿠시부터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춘 수셰프와, 동갑내기 동료로 오래 의지해 온 이창근 매니저가 이끄는 음료 프로그램과 서비스, 압구정 이전 이후 본격적으로 합류해 브랜딩과 디자인, 공간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는 운영 이사까지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관점이 다양해졌다.
최 셰프는 이제 자신의 첫 판단이 반드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말이 되지 않는 제안처럼 들리는 의견도 토론을 거치다 보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를 반복해서 경험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셰프 혼자의 역량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팀이 아니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성훈 셰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더 깊고 단단한 팀을 만드는 일이다.
하쿠시에서는 숯불을 메뉴 대부분을 조리하는 데 활용한다
숯과 불,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요리
최성훈 셰프의 요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는 숯과 불이다. 하쿠시에서 숯불은 재료의 수분과 지방, 향과 질감을 바꾸고, 손님 앞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이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숯 위에 오른 재료의 표면은 미세하게 마르고, 지방은 녹아 향을 내며, 안쪽의 온도는 서서히 달라진다. 같은 식재료라도 어떤 불을 만나고,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어느 속도로 익어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다. 최성훈 셰프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불을 다루며 재료의 미세한 특성을 조율한다.
숯을 다루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온 최성훈 셰프
최성훈 셰프는 ‘불 향을 입히기 위해 숯을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초창기에는 전체 메뉴의 약 90%가 숯을 활용했지만 지금은 약 70%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손님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요리가 숯을 거쳐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이 오히려 그가 원하는 결과다. 숯은 전면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맛의 뿌리를 만드는 도구다. 숯 위로 떨어진 고등어의 지방은 다시 연기와 함께 고등어에 스며들고, 한우의 지방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치며 단순한 열 조리를 넘어서는 복합적인 플레이버를 만든다. 지방과 연기, 열과 수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내는 다층적인 맛의 구조가 숯의 진짜 역할이며, 때로는 셰프가 의도적으로 재료의 질감을 조절하는 도구가 된다. 즉, 각 식재료가 가장 좋은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하쿠시의 여름 은어 메뉴
숯불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주는 요리로, 최 셰프는 여름을 대표하는 은어를 꼽는다. 일본에서는 가을의 전어처럼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생선이지만, 셰프는 계절 재료를 메뉴에 넣는 것을 넘어 ‘은어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맛’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기 위한 조리법을 연구한다. 맑은 강에서 자라는 은어는 바다 생선보다 감칠맛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고, 이를 숯불의 시간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은어는 한 시간 이상 숯 위에서 천천히 익는다. 빠르게 구우면 살이 물리적으로 익는 데서 끝나지만, 오랜 시간 겉면의 수분을 서서히 날려 보내면 풍미는 서서히 농축되고 표면은 바삭해진다. 그렇다고 속까지 마르는 것은 아니다. 뼈째 통으로 구워 내부의 수분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겉은 크리스피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대비가 완성된다. 머리와 꼬리, 뼈까지 모두 먹는 방식 역시 같은 철학의 연장선이다. 소금 외에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도 은어라는 식재료 자체를 가장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숯은 향을 입히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간을 통해 재료의 본질을 농축시키는 과정이며, 은어는 그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요리다.
시그니처 장어 구이와 베이징덕에서 영감을 받은 장어 테마키
장어 요리 역시 지금의 하쿠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다. 그러나 이 요리는 흔히 떠올리는 일본식 우나기와는 상당히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최성훈 셰프는 장어가 커질수록 함께 굵어지는 잔가시와 두꺼워지는 껍질에 주목했다. 지방이 풍부한 장어는 맛있지만 쉽게 질릴 수 있다는 점도 오랫동안 고민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크리스피 우나기'다. 장어 껍질은 베이징덕의 껍질처럼 바삭하게 구워 독특한 식감을 만들고, 이를 일본식 테마키로 재해석한다. 전병은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를 사용해 고소한 풍미를 더하고, 롤을 말기 직전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아몬드 페이스트를 더해 바디감을 만든다. 여기에 일반적으로 일본요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바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직접 만든 바질 비네거는 장어의 풍부한 지방감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산뜻함을 남긴다. 이 요리를 위해 사용하는 장어 역시 1kg이 넘는 대형 민물장어만을 고창 양식장에서 미리 주문해 공급받는다. 장어를 단순히 굽는 것이 아니라 식감과 지방, 향, 온도, 구조까지 모두 다시 설계한 결과물이 지금의 크리스피 우나기다.
하쿠시의 오픈 키친에서 요리 중인 최성훈 셰프
서울의 하쿠시, 최성훈 셰프만의 이야기
얼마 전, 손님이 그의 요리가 일본 관동 스타일인지 관서 스타일인지 물었다고 말하며, 최성훈 셰프는 그가 추구하는 요리에 대해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질문이 지금의 제 요리에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제 스승님이 관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출발점은 그곳이었지만, 지금의 하쿠시는 자신이 세계 여러 도시에서 보고 경험한 시간과 서울이라는 환경이 함께 만든 결과물입니다.”
최성훈 셰프에게 전통은 과거의 레시피를 복제하고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백 년간 축적된 조리 원리와 식재료를 대하는 태도를 이해하는 마음가짐이 진정한 전통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일본 요리의 출발이 되는 다시를 우릴 때의 온도와 시간, 물의 양을 타협하지 않는 이유, 밥을 짓기 위해 쌀을 다루는 방식, 식재료가 가장 좋은 상태를 기다리는 인내까지 기본 원칙의 이유와 태도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며, 그 이후부터는 비로소 셰프 개인의 영역이 펼쳐진다.
하쿠시의 은어 메뉴
“서울에서 만드는 하쿠시가 교토의 가이세키를 흉내 내는 순간 오히려 전통에서 멀어집니다. 교토에는 교토의 계절과 사람, 식재료가 있고 서울에는 서울의 계절과 시장, 생산자와 손님이 있어요. 저는 최고의 제철 식재료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재료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지금 하쿠시만의 색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가쓰오부시처럼 일본요리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 재료는 여전히 일본산을 사용하지만, 그 위에 쌓이는 계절과 재료, 이야기는 철저히 서울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유연성은 여러 나라를 거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일본에서만 요리를 배웠다면 지금과 같은 하쿠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문화이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타협하지 않는 집요함을 가르쳐준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고정관념도 존재했다. 처음 해외 주방에서 일할 당시 그는 '이게 왜 일본요리인가'라는 반발심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호주와 홍콩, 마카오, 런던 등 다양한 도시를 경험하면서 그 벽은 조금씩 무너졌다. 각 지역의 문화가 일본요리와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요리는 국적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이징덕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장어 테마키는 이러한 변화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조합일 수 있지만, 최성훈 셰프에게는 자신이 실제로 보고 먹고 경험했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물이다.
하쿠시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메뉴로, 치킨윙 속에 트러플 라이스를 채우고, 냉장 드라이 에이징 한 뒤 숯불에서 구운 요리 (좌), 한우의 본연의 맛을 위해 소스를 최소로 하고 숯불에서 미디움으로 익힌 야키 스키야키 위에 란오가츠(계란 노른자 튀김)을 올린 요리 (우)
하쿠시의 최성훈 셰프
새롭게 받은 미쉐린 스타, 그리고 행복한 요리
하쿠시는 올해 초, 새롭게 미쉐린 1스타를 받았다. "행복했던 건 당일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다음 날부터는 더 큰 책임감이 찾아왔다. 최 셰프에게 스타 명패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유지하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기존 손님뿐 아니라 미쉐린이라는 이름을 보고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같은 만족을 제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고, 그래서 더욱 안정적인 품질과 팀의 완성도를 고민하게 됐다.
최성훈 셰프가 찾은 단어는 ‘여운’이다. 각각 요리의 완성도보다 전체 코스가 끝났을 때 무엇이 기억에 남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음식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다음 요리를 자연스럽게 이어주어야 하고, 마지막 한입이 끝난 뒤에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 지금 하쿠시의 목표다. 공간 역시 같은 방향으로 변했다. 과거보다 훨씬 담백하고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음식과 서비스, 공간이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설계하기 위해, 더 늘어난 레스토랑 식구들이 매일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한다.
하쿠시의 최성훈 셰프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서울과 하쿠시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만들어갈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의외로 소박한 꿈이 남아 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요리하는 것. 셰프의 집념이 담긴 음식은 사랑하지만 파인다이닝의 과도한 문턱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의 생각처럼, 하쿠시는 앞으로도 날카로운 완성도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공존하는 서울의 레스토랑으로 남고자 한다. 그것이 최성훈 셰프가 지금 그리고 있는 하쿠시의 다음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