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펫을 계속 불기 위해 요리를 시작했던 소년은 어느새 부산의 바다에서 직접 재료를 찾고, 자신만의 프렌치를 만들며, 다음 세대의 요리사들이 꿈을 이어갈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어가고 있다.
광안대교가 정면에 펼쳐지는 레스토랑 램지는 3년 연속 미쉐린 가이드 부산에 셀렉티드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프렌치 파인 다이닝이다. 램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이규진 오너셰프는 “가장 젊은 셰프들이 부산 다이닝 신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를 하는 곳” 이라고 답한다. 이 팀의 평균 나이는 20대 중반. 오늘날 클래식이 된 미셸 게라르(Michel Guérard)와 폴 보퀴즈(Paul Bocuse) 같은 프랑스 현대 요리 거장의 조리법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 기법을 바탕으로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풀어내되, 담음새와 표현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다.
광안대교가 정면에 펼쳐지는 레스토랑 램지
트럼펫을 계속하기 위해 요리를 선택하다
이규진 셰프가 처음부터 요리사를 꿈꾼 건 아니었다. 포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트럼펫을 배웠다. 연주자가 꿈이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진로를 고민하다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부산조리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요리사가 되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혼자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트럼펫을 계속 배울 생각이었다. 부산에 온 뒤 가장 먼저 한 것도 악기를 사는 일이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서울의 ‘비스트로 드 욘트빌’에서 일한 경험이었다. 그전까지는 고급 레스토랑을 가본 적도 없었다. 담임교사의 권유로 상경한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요리에 몰두한 사람들의 세계를 만났다.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도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시면서 계속 요리 이야기만 했어요. 세계적인 셰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쉬는 날에는 도서관에 가서 요리책을 보거나 요리 행사에 갔죠. 그 사람들에게 요리는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었어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타미 리 셰프를 비롯해 이곳에서 만난 요리 선배들은, 서울에 올라온 어린 후배를 살갑게 챙겼다. 일이 끝나면 함께 식사하고, 요리 포럼이나 행사가 열리면 데려갔다. 비스트로 욘트빌은 그에게 프렌치 요리와 레스토랑의 세계를 처음 알려준 곳이자, 요리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게 한 출발점이었다.
이후 이직을 고민하던 시점에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서울에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었다. 여러 번 문을 두드렸지만, 호텔 내부 발령자여야 하거나 기능경기대회 경력이 필요하다는 답을 들었다. 그 계기로 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며 책으로 조리법을 익히고 연습했다. 여러 조리대회에도 기회가 닿는 대로 참가했다. 이규진 셰프의 프렌치가 시작된 곳은 해외의 유명 레스토랑이 아니라 책과 대회, 국내 주방이었다. 특히 서적에 정리된 클래식한 프렌치 조리법을 오래 공부했다. 최근에 해외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프렌치 요리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해온 요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저는 제가 고전적인 프렌치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국 재료가 대부분이고, 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다 보니 결국 제가 하는 요리는 한국만의 프렌치 요리더군요.” 그는 램지의 요리를 ‘뉴 코리안 프렌치’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자란 요리사가 한국 재료로 프렌치를 만드는 자신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물론 조리의 중심은 여전히 클래식 프렌치다.
레스토랑 램지의 테이블
생계에서 꿈을 위한 레스토랑으로
램지를 열기 전 이규진 셰프는 임시로 치킨집을 운영했다.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고된 시간을 보낸 뒤 문을 연 램지에 큰 성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제 생활을 꾸릴 정도면 됐죠. 인정받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하고 싶은 클래식 프렌치를 하면서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한 정도면 충분했어요.” 2021년 7월 만 26세의 나이로, 부산 전포동의 약 7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램지를 열었다. 테이블 두 개와 바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키우던 달마시안의 이름에서 레스토랑 이름을 가져왔다. 뵈프 부르기뇽, 어니언 수프, 에스카르고 같은 클래식한 프렌치 가정식을 코스로 선보였다.
로컬의 호응을 받으며 운영을 이어오던 중, 2022년 광안리로 자리를 옮기고, 2024년 7월에는 광안대교가 펼쳐지는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이제는 키친과 서비스를 포함해 8명이 함께 일한다. 램지가 차차 자리를 잡아가며 그의 목표도 점차 성장했다. 2024년 미쉐린 가이드 셀렉티드에 이름을 올릴 무렵 어느 미식 행사에 참여하게 된 그는, 평소 이름으로만 접하던 셰프들과 한자리에 서면서 처음으로 “나도 한번 부딪혀 봐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최근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목표는 램지의 이름을 내세운 요리다. “이건 램지 디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요리들이다.
유예은 페이스트리 셰프의 빵
램지를 만드는 사람들
램지의 메뉴는 계절에서 시작한다. 시장이나 경매장에서 좋은 식재료를 만나면 그 재료를 어떻게 사용할지 팀과 의견을 나눈다. 윤종형 수셰프와 유예은 페이스트리 셰프를 비롯한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보태고, 여러 차례 테스트하며 디시를 다듬는다. 안철 소믈리에 역시 음식에 대한 피드백을 거리낌없이 낸다. 이규진 셰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팀 전체가 그 음식에 납득하는지다. 만든 사람이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음식을 손님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없다는 이유다.
계절을 중요하게 보지만 제철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사용하지도 않는다. 시즌이 지나치게 짧거나 대체가 어려운 재료는 신중하게 사용한다. 대신 디시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재료를 바꾼다. 요리 외에 가장 신경 쓰는 것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서비스”라고 답했다. 서비스팀의 옷차림과 말투, 기본 세팅을 한번 더 살피고, 영업 중에는 직접 홀에 나가 테이블 상태를 자주 확인한다. 음식은 주방에서 끝나지 않고, 손님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부산 밀축제 행사장에서의 이규진 셰프, 윤종형 수셰프
부산이라는 가장 가까운 산지
램지가 식재료를 고르는 기준은 실용적이다. 기장 미역을 사용하는 것도 지역을 상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생선도 직접 가서 받아온다. 생선은 산지와의 거리가 맛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 아무리 좋은 생선이 나와도 이동하는 하루 동안 상태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규진 셰프는 자갈치에서 경매받은 생선을 다음 날 배송으로 받지 않는다. 아이스박스를 들고 직접 가서 기다렸다가 경매가 끝나면 바로 가져온다. “생선은 앞으로 정말 부산 것만 쓰게 될 것 같아요. 신선도에서는 따라올 수가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재료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직접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비장탄에 구운 갈치외 뵈르블랑 소스
부산을 담은 프렌치 요리들
8지 이상의 부산 갈치(몸통 너비가 성인 손가락 8개 정도 폭에 달하는 매우 희귀하고 커다란 대왕 갈치)는 기장 다시마 육수로 염지한 뒤 숙성하고, 약 이틀간 건조해 수분을 조절한다. 그 후 비장탄에 구워 숯의 은은한 풍미를 더한다. 무는 만두 형태로 빚어 아스파라거스와 새우, 샬롯, 당귀를 채우고, 갈치 액젓으로 간을 해 속재료의 풍미에 감칠맛을 더했다. 가니쉬에는 굴을 연상시키는 향을 가진 보리지 잎과 알싸한 차이브, 생 아스파라거스를 얇게 썰어 사용해 신선한 향과 식감을 더했다. 소스는 닭과 갈치 뼈, 새우 껍질을 함께 우려낸 육수에 화이트와인을 더하고 버터로 유화한 뵈르 블랑이다. 전통적인 프렌치 소스를 바탕으로 갈치와 새우, 닭에서 얻은 감칠맛을 겹쳐 해산물의 풍미를 더욱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램지의 메추리 요리
이와 함께 현재 이규진 셰프가 램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요리로 꼽는 것은 메추리다. 소고기처럼 익숙한 육류가 아닌 조금 더 개성 있는 재료를 다뤄보고 싶어 오랫동안 고집해 온 재료다. 광안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발이 그대로 붙어 있는 형태만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손님도 있었다. “닭이 땅을 얼마나 밟고 다니는데 그 발을 그대로 내느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 년 사이 반응은 크게 달라졌다. 파인다이닝을 경험한 손님이 많아지면서 낯선 식재료를 받아들이는 폭도 넓어졌다. 예전에는 손님들의 반응에 눈치를 보며 사용했던 재료를 이제는 레스토랑을 대표하는 접시로 내놓는다.
메추리의 가슴살은 허브를 우린 물에 염지한 뒤 천천히 굽는다. 다리는 오리 기름에 천천히 콩피한 뒤 쉐리 와인 글레이즈를 발라가며 굽고, 끝에 허브를 묶어 손잡이처럼 만든다. 트러플을 더한 화이트와인 소스와 흑마늘 퓌레를 곁들이고, 가니쉬인 당근은 당근즙과 소금만으로 조리한다.
도모헌 부산시 행사 메뉴 서비스 중인 이규진 셰프
부산이 키운 셰프 이규진
“부산은 어린 저한테 정말 다 퍼줬어요.” 그는 학생시절 삼진어묵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고, 해외 조리대회에 참가할 비용이 부족할 때는 지역 조리업계 선배들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런 도움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려 여러 가지로 힘쓰고 있다. 현재 영산대학교 서양조리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또래 셰프들과 함께 연 행사의 수익전액으로 산 요리책을 학생들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열리는 외식 행사 역시 다이닝 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규모를 따지지 않고 나선다.
그가 작은 행사까지 챙기는 건 지역에 보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파인다이닝을 경험하는 사람이 늘면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도 늘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손님이 많아지면 부산의 좋은 식재료를 설명할 자리도 많아진다. 이규진 셰프는 부산 미식이 성장하려면 먼저 각 레스토랑이 제대로 장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스토랑 경영이 안정되면 음식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손님이 많아지면 재료가 계속 소비되고, 결국 생산도 안정화되어 가격도 오히려 낮아지잖아요. 그러면 더 좋은 재료를 쓸 수 있게 되고요.” 레스토랑이 버텨야 좋은 재료를 사고, 사람을 오래 고용하고, 새로운 메뉴에도 투자할 수 있다.
램지에서 요리 중인 이규진 셰프
“F&B 업계의 직업이 보수도 높지 않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잖아요. 그래도 정말 버티고 열심히 하고 잘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오히려 이 직업을 통해 더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부산에서는 램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젊은 직원이 몇 년 뒤 자신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다. 이규진 셰프에게 레스토랑의 성장은 규모나 매출만 늘리는 일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계속 이 일을 선택할 수 있게 이끄는 것도 오너셰프가 해야 할 일이다.
이규진 셰프는 이제 ‘램지다운 요리’에 집중한다. 대표 메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접시를 보는 순간 “램지답다”는 인상이 드는 요리,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디시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레스토랑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맛있는 곳이요. 여러 가지 생각 안 해도 되고, 그냥 맛에서 의미가 전달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