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텐더가 일하는 모습만으로도 손님에게 좋은 에너지를 건넬 수 있어야 좋은 바라는 손석호, 흐트러짐 없는 한 잔과 친근한 격식으로 그 기준을 완성한다.
자동으로 스트리밍 되는 공간의 배경음악이 당연해진 시대에도 손석호는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틀고, 음악이 멈추는 순간을 즐기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다. 클래식 바텐딩의 정교함을 한국적인 공간 감각과 서비스로 풀어낸 소코는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바 신에서 유행보다 기본을, 확장보다 코어를, 개인보다 팀의 성장을 강조하며 클래식 바가 지속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보여준다.
오감으로 완성한 1920년대의 응접실 느낌의 소코
서울 한남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소코는 1920년대 경성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응접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짙은 색의 가구와 카펫, 벽면을 채운 동양적인 프레임과 은은한 조명 사이로 재즈와 올드팝이 흐른다. 공간을 채운 샌들우드 향과 잔잔한 물소리까지 더해지며, 소코는 시각뿐 아니라 후각과 청각을 통해 손님을 일상의 속도에서 천천히 분리한다. 괜히 손석호를 ‘오감예술가’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스물아홉, 늦게 시작해 빠르게 올라서다
그의 시작은 바텐더가 아니었다. 2002년 부산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던 시절, 음료 수업에 흥미를 느낀 그는 교실 밖에서 더 다양한 경험을 쌓고자 당시 부산에서 이름난 남포동의 케이크 카페 ‘쉬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공간의 흐름을 살피는 일에 타고난 감각이 있음을 깨달았고, 그 경험은 군 제대 후까지 이어졌다.
커피 다음으로 빠져든 것은 와인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와 와인 동호회 활동을 할 정도로 몰두했고, 프랑스 유학을 고려하며 서울의 와인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인이 완성한 와인을 해석하고 판매하는 일보다 직접 음료를 만드는 일이 자신의 성향에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로 상경한 뒤 모델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방황의 시기, 그를 위로한 것은 일이 끝난 후 하루를 마무리하며 마시는 칵테일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 잔의 칵테일이 주는 위로
그 기간 가까워진 바텐더들의 소개로 2011년 1월, 스물아홉의 늦은 나이에 ‘커피 바 케이’의 주니어 바텐더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 본점을 둔 당시 ‘커피 바 케이’는 도제식 체계로 운영되었는데 주니어 바텐더가 바 카운터 안쪽에 들어서기까지는 보통 2년 넘게 기다려야 했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계기로 한 달 만에 그 기회를 얻었다. 지금도 자신의 커리어에서 첫 번째 전환점으로 꼽는 순간이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한 동시에, 늦게 시작한 바텐더 생활 이전에 쌓아온 경험들이 모두 지금을 위한 초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2년 12월 커피 바 케이 한남점이 문을 열면서 처음으로 매니저로서 바 운영에 참여했다. 이후 역삼점과 청담점 오픈에도 함께했고, 역삼점과 한남점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늦게 출발했지만 빠르게 자리를 잡은 그는 어느 순간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가 됐다고 느꼈다. 2016년 결혼을 앞두고 삶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2017년 소코 오픈 당시 손석호
한국과 세계 여러 도시의 바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기준을 다듬은 그는 클래식 바텐딩의 기준을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2017년 2월, 현재의 한남동 자리에 소코를 열었다.
‘클래식’과 ‘퍼펙트’라는 기준
손석호가 자신의 바텐딩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클래식’과 ‘퍼펙트’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일본 긴자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크래프트 바텐딩’이다. 얼음의 상태와 잔의 온도, 재료의 배합은 물론 바텐더의 동작과 서비스의 흐름까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소코에서는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는 것보다 한 잔의 완성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손석호는 바텐더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좋은 칵테일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텐더가 좋아하는 맛과 손님이 맛있다고 느끼는 맛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맛있는 칵테일이어야 합니다. 바텐더의 취향이나 이야기가 담겨 있더라도, 그 맛이 손님에게 전달되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해요.”
소코는 시그니처 칵테일과 손님의 취향과 그날의 기분을 바탕으로 바텐더가 추천하는 클래식 칵테일, 다양한 스피릿과 바 푸드를 함께 선보인다.
단맛과 산미의 균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White Lady’(좌), 소코의 에스프레소 마티니인 ‘가베티니’(우)
손석호가 클래식 칵테일 가운데 특히 강조하는 것은 ‘화이트 레이디’와 ‘프렌치 75’다. 모두 진을 기반으로 하며 단맛과 산미, 알코올의 균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칵테일이다. 헬카페의 강배전 원두로 만드는 소코의 에스프레소 마티니인 ‘가베티니’는 소코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메뉴다.
그는 새로운 시그니처를 개발하는 일만큼 클래식 칵테일을 정확하게 만드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메뉴 개발은 한 사람이 완성된 레시피를 전달하기보다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함께 맛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표의 취향을 반복하는 팀이 아니라, 공통된 기준 안에서 각자의 감각을 발전시키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다.
오랜 시간 직접 끓인 닭육수과 수제면으로 만든 '소코 라멘'
칵테일 이외의 메뉴 중 손석호가 추천하는 것은 ‘소코 라멘’이다. 유행이나 계절에 따라 교체되는 메뉴가 아니라, 소코라는 공간과 손님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기를 바라는 메뉴다.
바텐더의 움직임까지 서비스가 되는 곳
소코는 39석 규모의 비교적 넓은 바다. 바 카운터뿐 아니라 테이블 좌석을 함께 운영해 칵테일에 집중하고 싶은 손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손님을 모두 수용한다. 10명의 직원은 각자의 포지션을 담당하면서도 공간 전체의 흐름을 함께 살피며 움직인다.
늘 팀원들에게 감각과 센스, 예민함, 넓은 시야를 요구한다. 좋은 서비스는 정해진 동작을 정확하게 반복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손님의 표정과 대화의 흐름, 잔이 비워지는 속도와 주변의 움직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좋은 바와 바텐더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2013년 페르노리카 바텐더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방문한 런던 랭햄 호텔의 아르테지안 바에서였다. 인파로 붐비는 그곳에서 바텐더들은 마치 여러 개의 눈을 가진 사람처럼 바 전체를 살피며 어느 한 손님도 놓치지 않았다.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만으로도 손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세심한 대접을 받았는지만이 아니었다. 분주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움직이는 바텐더들의 모습 자체에서 전달되는 에너지였다. 손석호는 그곳에서 좋은 바란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순간뿐 아니라, 바텐더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가 정의하는 소코의 서비스는 ‘친근한 격식’이다. 바텐더의 태도와 칵테일에는 일정 수준의 격식이 필요하지만, 그 격식이 손님을 긴장시키거나 공간과 거리를 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금액 면에서 가볍게 느껴지는 곳은 아닐 수 있지만, 마음만큼은 만만하게 찾아올 수 있는 동네 바였으면 합니다. 퇴근길에 들러 한잔하고, 대접받으며 쉴 수 있는 곳이요.”
단골손님에게는 이웃이나 친구처럼 다가가고, 처음 방문한 손님에게는 취향과 상황에 맞는 거리와 설명을 제공한다. 모든 손님에게 같은 문장과 동작을 반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 조금씩 달라지는 비스포크 서비스다.
팀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친밀한 격식
확장보다 코어, 개인보다 팀
손석호는 한때 바텐더이자 사업가로서 여러 공간과 사업으로 외연을 넓히는 방향을 고민했다. 2020년에는 탄산바를 열었고, 바를 넘어 식당과 다양한 아이템을 전개하는 가능성도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지나며 확장이 반드시 전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그가 다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소코의 코어다. 처음 바텐더가 됐을 때 배운 클래식의 기준, 손님에게 안정적인 한 잔을 제공하는 기술, 그리고 팀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운영 구조를 다시 정비하고 있다.
한남동 소코 간판 및 입구
그는 젊은 오너 바텐더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바 문화가 빠르게 다양해지는 현상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작고 미니멀한 공간, 실험적인 메뉴, 바텐더 개인의 취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새로운 바들이 등장하며 각 공간의 개성과 디테일이 이전보다 뾰족해지는 흐름이다.
그럼에도 소코가 선택한 방향은 유행을 따라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안정적인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대표가 팀원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팀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를 더 많이 이야기하려 한다.
1920년대의 응접실을 닮은 공간에서 클래식 음악과 샌들우드 향,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겹친다. 소코의 목표는 새로운 자극을 계속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이 공간에서 경험하는 한 잔과 한 번의 휴식을 매일 같은 수준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이 만든 칵테일과 딱딱하지 않게 지켜낸 격식. 소코가 한남동에서 지켜온 것은 결국 그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