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완 셰프는 자연의 리듬에 자신을 맡기며, 계절로 완성되는 디시를 펼쳐내고 있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피크닉(Piknic)엔 계절의 흐름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레스토랑 ‘기가스(GIGAS)’가 있다. 2023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미쉐린 그린 스타를 유지해 왔고, 2025년엔 첫 1스타를 받으며 이름이 더욱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실제로 기가스를 직접 경험하고 나면, 이러한 수식어는 그간의 노력에서 비롯된 진정한 결과값임을 금세 체감할 수 있다. ‘지속 가능성’과 ‘계절성’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소비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산 자락 피크닉 뮤지엄 안에 자리한 기가스에선 계절의 온도와 자연의 흐름이 오롯이 스며든 디시를 만날 수 있다.
정하완 셰프가 ‘기가스’란 이름을 택한 이유 역시 화려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레스토랑 오픈을 준비하면서 ‘요리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란 질문을 반복적으로 되뇌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고민과 고찰이 이어지는 여정 가운데 ‘땅에서 태어나 자란 존재’란 어원을 지닌 그리스 신화 속 ‘기가스’란 단어에서 모든 생각이 마침내 정리됐다고 말했다.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식재료를 중시하는 철학의 시작점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기가스는 잘 기획된 하나의 콘셉트를 지향하기보단 요리와 음식에 대한 곧은 태도와 가치관을 드러내는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었다.
아삭한 궁채와 산미 있는 크렘 프레시가 경쾌하게 층을 이루는 ‘궁채, 새우, 크렘 프레시’
경험을 통해 설득에 유연해지는 법
초기의 기가스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정하완 셰프가 가장 먼저 한국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바로 채소였다. 기가스에선 이를 얼마나 입체적인 맛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또 디시의 강력한 중심축으로 세울 수 있는지를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메시지가 앞설수록 음식은 점점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됐다.
매장이 쉬는 날이면 정하완 셰프는 본가에 자리한 ‘와니 농장’으로 내려가 농부가 된다. 직접 씨를 뿌리고 작물을 돌보며 계절의 속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선 접하기 힘든 ‘지중해식’ 장르는 물론 그의 요리 표현 방식을 손님들은 낯설어했고, 반응 또한 편차가 있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차츰 시간은 쌓였고, 매장은 지금의 남산 중턱으로 옮기게 됐다. 이와 함께 그는 보다 더 본질에 집중하기로 했다. 음식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하고픈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각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오래 지속될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 정하완 셰프가 레스토랑 운영 과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일이다.
그는 여전히 지중해 요리를 이야기하지만 지중해의 재료를 재현하려 하진 않는다. 국내 기후와 토양에서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남겨진 건 방식이다.
우리만의 떼루아를 느낄 수 있도록 제철 식재료를 중심에 두고, 채소와 해산물의 조합을 단순하게 구성하며, 간을 최소화해 재료가 가진 방향을 흐리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그가 몸소 체득한 방향성이었다. 즉 그에게 ‘지중해’란 더 이상 특정 지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는 하나의 사고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요리의 씨앗을 품은 대지에 대한 존중
정하완 셰프의 요리 세계를 이해하려면 유럽에서의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셰프들의 해외 진출이 흔치 않던 시절, 그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무가리츠(Mugaritz)’를 거쳐, 독일 ‘라비(LA VIE)’의 크리에이티브 헤드 셰프로 일하며 세계적인 셰프들과 같은 주방을 경험했다.
이로써 얻은 깨달음은 의외로 단순했다. 기술은 공유되고 따라잡히지만, 요리사의 이야기는 복제되지 않는다는 것. 맛있는 음식은 기본 조건일 뿐,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드러내는 서사라는 점이었다.
씨앗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접시 위에 오르기까지, 정하완 셰프와 기가스는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지 않는다.
기가스의 처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료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농장으로 연결됐다. 이때부터 그는 기존에 운영해오던 가족 농지를 ‘와니 농장’으로 확장했고, 레스토랑의 철학을 구체화하는 근간으로 삼았다. 실제로 그는 매장이 쉬는 날마다 군포 본가에 내려와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옆 와니 농장에서 농부의 삶을 산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디시를 준비하기 위한 씨를 뿌리고, 직접 작물을 돌보며 수확 시기를 정한다.
정하완 셰프에게 농장에서 작물을 돌보는 시간은, 요리사가 자연과 손님 사이를 잇는 존재임을 일깨우는 겸허함의 과정이다.
그는 농장에 대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공간이라고 힘주어 설명했다. 사실 레스토랑에선 여러 복합적 요소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따라오지만, 농장에선 모든 것이 자연의 속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더욱더 겸허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작물이 예상대로 자라지 않으면 이유 없이 실패하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더라도 날씨 즉 자연 앞에선 무력해지고 그 모습 그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간을 버텨낼수록 요리사가 재료 위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닌, 그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란 걸 다시금 체감했다고 덧붙였다.
기가스의 ‘지속 가능성’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이미 소비된 식재료가 퇴비로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는 과정, 오래 사용하는 포장재 관리 등 일상 가운데 자연스레 이어지는 생활 방식이다.
이러한 정하완 셰프의 요리 철학과 자세 때문인지 기가스의 지속 가능성은 특별한 장치로 드러나지 않는다. 일례로 레스토랑에서 발생하는 식재료 쓰레기는 양념이 묻은 음식물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후자는 퇴비가 되어 다시 농장으로 돌아간다.
포장재 역시 완전히 배제하기보단 오래 사용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택한다. 환경을 위한 행동이 또 다른 의미에서 불필요한 소비를 일으킬 수 있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에게 ‘지속 가능성’과 ‘팜투테이블(Farm to Table)’은 그저 내세우려는 선언이 아니라 반복되는 생활의 방식인 것이다.
무가리츠(Mugaritz), 라비(LA VIE) 등 유럽 최정상급 주방을 거치며 수많은 디시들을 고민하고 개발했던 정하완 셰프는 기가스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단단하게 구축했다.
계절과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 내추럴리즘
이렇게 땅에서 탄생한 또 다른 자연은 결국 접시 위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첫 번째가 최근 선보인 스몰 바이트 디시 ‘궁채, 새우, 크렘 프레시’다. 한입 크기로 지그시 서막을 여는데, 새우와 크렘 프레시, 식빵, 그리고 땅콩과 레몬 소스가 차례로 맛의 층위를 쌓아올리고, 궁채의 아삭한 식감과 땅콩의 고소함, 크렘 프레시의 산미와 부드러움이 이어지면서 풍미의 여운이 예상보다 가볍게 사라진다.
이 레시피는 특정 요리에서 차용한 게 아니라, 궁채와 땅콩을 식재료의 주인공으로서 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완성한 조합이었다. 이렇듯 정하완 셰프는 자연의 리듬 따라, 식재료가 리드하는 선율에 고객의 감각을 맡길 수 있도록 식경험 자체에 우위를 두고 있다.
기가스는 고정된 시그니처 디시 대신 계절의 온기와 바람, 땅의 기운을 담아내는 제철 디시를 선보인다.
기가스엔 고정된 시그니처 디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계절, 온기, 바람, 땅의 기운을 따르면서 이를 오롯이 담아내는 데 골몰하기 때문이다. 겨울엔 저장돼 있던 비트와 무가 서서히 단맛을 끌어올리고, 봄이 오면 눈물콩과 딸기가 접시 위로 경쾌하게 안착한다. 여름엔 허브와 레디시가 중심을 잡으면서 요리의 결을 바꾸기도 한다.
같은 메뉴라 해도 계절이 한 번 지나가면 맛은 조금씩 달라지고, 와인 페어링 역시 새롭게 구성된다. 즉 정하완 셰프의 요리는 레시피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져 있다. 요리를 완성하는 건 결국 계절이자 자연인 것처럼.
(좌) 재료의 방향을 흐리지 않는 것. 기가스의 요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 (우) 국내 유일의 지중해식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기가스’는 한국의 떼루아를 품은 제철 채소와 해산물로 독창적인 디시를 선보인다.
‘강원도 까치버섯, 비양도 갑오징어, 딜’ 디시는 겨울 풍경처럼 차분하게 등장한다. 강원도 삼척에서 들여온 까치버섯의 깊은 향 위로 말린 해산물에서 끌어낸 감칠맛이 겹쳐지고, 오징어 먹물 소스가 흐르듯 더해진다. 특히 마지막으로 올라간 무늬오징어는 바다의 온도를 그대로 남긴다.
사실 이 디시는 미리 정해놓은 메뉴라기보단 당일에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재료로 만든 결과물에 가깝다. 평소 정하완 셰프는 식재료를 주문해 받을 때 특정 생산자를 고집하기보다 신뢰하는 어부와 경매사의 판단을 따른다. 즉 재료로 먼저 방향을 잡고, 요리로 이 흐름을 유연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짭잘한 블루치즈와 신고배의 산뜻한 단맛, 그리고 가볍게 얼린 세미 프레도의 부드러운 질감이 균형을 이루는 ‘푸름 당베르 신고배 세미 프레도’
디저트 디시도 마찬가지다. 농장에서 얻은 팥과 곶감, 초콜릿과 우엉 아이스크림이 한 접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굉장히 익숙한 재료들이지만 맛의 결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단맛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끌지 않고 잠시 뒤 여운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뿌리 채소 특유의 기분 좋은 흙내음이 은은하게 머물다 입안을 환기시킨다. 재료가 지나온 순간과 기억을, 감각으로 전하는 방식이다.
정하완 셰프는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를 뜻하는 그리스 신화 속 ‘기가스’로부터 레스토랑의 철학을 세웠다.
자연과 식탁 사이 그리고 선순환
정하완 셰프는 디시에 손이 많이 갈수록 오히려 맛이 흐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복잡한 테크닉으로 완성도를 증명하기보다 재료가 가진 방향과 성격을 끝까지 유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가스의 요리는 구조는 단순하지만 감각은 깊다. 특히 조형적 완성도보다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고 순응하는 데 더욱 집중한다.
겨울의 바다와 숲이 차분하게 겹쳐지는 디시, ‘강원도 까치버섯, 비양도 갑오징어, 딜’
그는 요리사를 예술가로 신격화하는 시선에 대해서도 조심스럽다. 요리는 농부와 어부, 그리고 손님 사이를 커뮤니케이션하는 하나의 연결 작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좋은 요리는 결국 좋은 재료가 만들어낸다는 신념, 바로 이를 존중하지 않는 한 어떤 이야기에도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한 의외로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요리보다 경영이었다. 각각의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오래 지속될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 레스토랑 역시 하나의 생태계와 같음을 깨닫게 되면서, 균형이 무너지면 오래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뿌리 깊이 배우게 됐다.
4년 연속 미쉐린 그린 스타, 2025년 첫 미쉐린 1스타. 그러나 기가스의 진짜 이야기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손님을 다시 불러온다는 믿음. 그래서 기가스는 서두르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는 속도처럼, 이곳만의 리듬으로 느리게 흘러간다. 무엇보다 정하완 셰프의 요리는 주방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씨앗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
농장에서 배운 ‘겸손’을 다시 주방으로 가져오는 반복 속에서 요리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음식. 그리고 이러한 여정의 끝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무얼 먹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