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기억이라고 말하는 두 셰프가, 한국의 계절을 담아 선보이는 가이세키. 카이슌은 변화하는 기억과 풍경을 담아낸다.
모든 가이세키가 ‘계절’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지만, 그 계절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제철 식재료만으로는 온전히 그 답을 알 수 없다. 같은 종류의 생선도 시기에 따라 상태가 달라지고, 그에 맞춰 손질과 조리법도 달라진다. 국물의 온도와 간, 함께 사용하는 재료와 그릇도 계절감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다. 서울의 가이세키 레스토랑 카이슌(開旬)이 사계절이 아닌, 매달 메뉴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레스토랑의 이름에는 레스토랑이 추구하는 방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열 개(開)’에 ‘열흘 순(旬)’을 들여다보자. 순(旬)은 열흘이라는 뜻과 함께 짧은 제철, 즉 식재료가 가장 좋은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두 셰프는 이 이름이 ‘계절이 열리는 매 순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루, 한 주가 지나면 새로운 제철 재료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음식도 달라진다. 특정한 시그니처 메뉴를 두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그 시기에 가장 좋은 재료를 골라 가장 좋은 상태로 보여주는 것. 카이슌이라는 이름은 그 원칙에서 출발한다.
청담동에 위치한 카이슌의 다이닝 공간 전경
카이슌의 음식을 이해하려면 두 셰프의 서로 다른 경력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동혁 셰프가 오랜 시간을 보낸 나다만(Nadaman)은 1830년 오사카에서 시작한 일본요리 브랜드로, 일본의 주요 호텔을 비롯해 여러 지역과 해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전통적인 일본요리를 선보여왔다. 신동혁 셰프가 이곳에서 일본요리의 기본을 익혔다면, 히네노야 마코토 셰프는 교토의 탄쿠마 키타미세와 츠지토메, 기온 야마기시 등에서 가이세키 경력을 쌓았다. 탄쿠마 키타미세는 1928년 문을 열어 3대째 이어지고 있는 교토요리의 노포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비롯한 문인들과 일본 다도의 우라센케·오모테센케로부터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곳이다.
나다만 근무 당시의 신동혁 셰프(좌), 교토 기온 야마기시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히네노야 마코토 셰프(우)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의 인연이 카이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스승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신동혁 셰프의 스승인 나다만의 혼다 마사미 셰프와 마코토 셰프의 스승인 츠지토메의 츠지 요시카즈 셰프가 서로 ‘쿄다이(兄弟)’, 즉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그 인연을 계기로 두 셰프 역시 신동혁 셰프가 26세이던 무렵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각자의 주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이후 서울에서 다시 만나 카이슌을 열었다. 함께 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신동혁 셰프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쿄다이가 각자의 경험을 가지고 다시 만난” 것이라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일본요리의 기본을 익히다
신동혁 셰프는 2002년 요리학교에 진학했지만 자신에게는 학교보다 실제 주방에서 직접 배우는 방식이 더 맞는다고 판단해 중퇴하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실제 주방에서 부딪히며 익히는 과정 자체가 요리를 배우는 학교였다. 처음부터 일본요리에 대한 뚜렷한 지식이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일본요리를 배우면서 재료를 다루고 손질하는 방식, 다시를 내고 간을 맞추는 법, 계절을 음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점차 매력을 느꼈다.
신동혁 셰프의 가장 긴 수련의 장은 나다만이었다. 요코하마를 시작으로 도쿄와 상하이 등 서로 다른 도시에서 근무했고, 도쿄 샹그릴라 호텔의 나다만에서는 수셰프를 지냈다. 하나의 브랜드 안에서도 도시가 달라지자 사용하는 재료와 손님의 식문화가 달라졌다. 이를 통해 신동혁 셰프에게 분명해진 것은 일본요리의 기본은 지키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 셰프가 말하는 일본요리의 기본은 재료의 손질, 다시, 정확한 간, 불의 조절이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일본요리도 재료를 어떻게 손질하고 어느 온도로 익히며 어떤 간을 더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섬세한 불 조절로 구워내는 카이슌의 장어
그중에서도 신동혁 셰프가 특히 중요하게 꼽는 음식은 스이모노(吸い物), 맑은 국물 요리다. “스이모노 하나를 먹어보면 그날 요리의 방향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 날 셰프가 준비한 재료와 일본요리의 기본 테크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음식이기 때문.
섬세한 다시와 간으로 완성한 카이슌의 스이모노
하나하나의 요리 뿐 아니라, 전체 코스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좋은 재료를 정확히 손질하고, 맛을 해치지 않는 간과 적절한 조리를 더해야 한다. 그 위에 계절감과 조리 기술, 코스의 흐름, 손님과의 교감이 더해질 때 신동혁 셰프가 생각하는 좋은 가이세키가 완성된다.
한 끼의 흐름으로 계절을 표현하다
2006년 요리를 시작한 마코토 셰프는 하나의 요리를 잘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한 끼 전체를 통해 계절과 문화를 표현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가이세키의 길을 택했다. 교토의 전통적인 일본요리와 가이세키를 다루는 여러 주방에서 기본을 익히고, 이후 헤드 셰프로 진급하며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계절을 어떻게 표현할지, 어떤 음식을 먼저 내고 무엇을 그다음에 배치할지, 앞선 음식의 맛과 온도를 다음 음식이 어떻게 이어갈지, 어떤 그릇을 사용할지까지가 모두 가이세키를 구성한다.
마코토 셰프는 결국 새로운 표현에 앞서 전통과 기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통을 이해해야 지금의 재료와 환경에 맞는 가이세키를 만들 수 있다 드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기온 야마기시에서 헤드 셰프로 일한 시간은 이러한 방향을 자신의 음식으로 다듬는 과정이었다.
두 셰프의 경험으로 완성하는 카이슌
신동혁 셰프는 재료의 정확성을 추구하고 마코토 셰프는 교토의 가이세키의 흐름을 조절하며, 카이슌만의 색을 함께 만들어낸다. 함께 메뉴를 구상할 떄에도 각자의 강점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눈다. “각자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서울이라는 환경에서 하나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각자의 음식이 아니라 카이슌의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는 계절이 있다. 카이슌에서 계절감이란, 손님이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음식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계절을 느끼게 하는 모든 요소다. 예를 들어 ‘가을 메뉴’라는 커다란 타이틀에 크게 좌우하지 않고, 자연송이가 나오면 송이로 도빙무시를 준비하고, 은어가 나오면 은어 구이를 올린다.
계절을 한 접시에 담은 카이슌의 핫슨
서울에서 새롭게 풀어내는 가이세키
두 셰프가 일본에서 쌓은 경험은 서울에서 새로운 재료와 손님을 만나며 ‘서울만의 가이세키’로 발전했다. 신동혁 셰프는 일본에서 먹었던 음식을 서울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 셰프는 일본요리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지역의 재료와 식문화에 따라 표현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요리하는 마코토 셰프에게는 한국의 식재료와 손님 모두 새로운 경험이다. 마코토 셰프는 일본에 비해 한국 손님들이 음식에 대한 관심이나 반응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고 느꼈다. 일본에서는 가이세키가 오랫동안 생활과 문화 안에 자리해온 반면, 한국에서는 이를 새로운 음식 문화로 접하는 손님도 많다. 그래서 그에게는 음식을 정확하게 만드는 것과 함께 각 음식의 의미를 손님이 부담 없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전달하는 일도 중요하다. 재료 역시 일본에서 사용했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한국의 생선과 해산물, 채소와 육류를 직접 다뤄보고 각각의 맛과 특성에 맞춰 조리법을 판단한다. “서울에서의 경험을 통해 저 역시 가이세키를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코토 셰프의 말처럼, 서울의 가이세키는 도쿄나 교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서울만의 것이다.
카이슌의 주방에서 코스를 준비하는 신동혁 셰프와 히네노야 마코토 셰프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두 셰프는 규모를 넓히기보다 음식의 완성도를 꾸준히 높이고, 시간이 지나도 계절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본요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 자극하며 정진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덕붙여 맛있는 요리도 좋지만, 카이슌의 경험이 계절의 기억을 남겼으면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음식의 향과 식감, 온도는 계절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다. 전체적인 기억과 느낌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떠오르는 것. 신동혁 셰프가 말하는 “음식은 기억”이라는 생각도 이와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