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든 요리는 맛도, 모습도, 100% 한국 음식 그대로다”
박승훈 셰프가 ‘Hansik Goo(한식 구)’ 레스토랑에 합류 차 홍콩으로 처음 이주했을 때, 그의 영어 실력은 한 문장조차 제대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로 키친에서 동료들과 의사소통이 필요할 때마다 헤드 셰프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지난 1년간 자신이 맡아온 막중한 책임에 대해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2020년 당시,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이었던(2025년 기준, 현재 미쉐린 3스타)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는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며 홍콩 센트럴에 Hansik Goo(한식 구)를 오픈했다. 그리고 밍글스에서 근무 중이었던 박승훈 셰프는 스승을 따라 언어도, 문화도 낯선 홍콩으로 건너왔다. 이때부터 오픈 멤버로 수셰프 역할을 맡았고, 헤드 셰프로 선임된 이상근(Steve) 셰프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주방팀에서 호흡을 맞춰가다가 이상근(Steve) 셰프가 차기 행보에 따라 레스토랑을 떠난 후, 운영 전반에 익숙하고 어학 실력도 급성장한 박승훈 셰프가 자연스럽게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후 그는 2022년부터 한식 구가 유지해온 미쉐린 1스타의 명성을 책임감 있게 이어가고 있다.

한식 구(Hansik Goo)의 수셰프를 거쳐 헤드 셰프로서 미쉐린 1스타의 영예를 이어가고 있는 박승훈 셰프
외국인 고객의 한식 경험을 높일 수 있는 메뉴 조합
사실 한식 구는 오픈 초반엔 캐주얼한 분위기 속에서 정갈한 집밥 스타일 한식을 단품으로 제공하며, 손님이 편하게 음식을 고르고 즐길 수 있도록 메뉴를 다양하게 구성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찾아오면서 모든 계획이 뒤바뀌었다.
“그때 메뉴에 20여 종의 요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서울에서 기획한 요리를 해낼 한국인 직원을 홍콩으로 충분히 보낼 수 없었고, 결국 계획한 대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죠”라며 박 셰프는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했다.
“결국 저희는 파인 다이닝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 셰프님과 저는 이 결정이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여겼어요. 레스토랑 수준도 높일 수 있고, 다양하고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면서 한국 음식의 스펙트럼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보여줄 수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죠.”
단품 메뉴 구성은 고객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고객이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메뉴를 조합해 즐길 수 있어 식사의 유연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운영자 입장에선 인력과 자원이 부족할 경우, 식재료와 메뉴, 코스 구성이 비교적 고정된 파인 다이닝 스타일 테이스팅 메뉴가 오히려 운영 비용을 통제하고 낭비를 줄이는 데 유리해, 수익성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

한식 구(Hansik Goo)는 테이스팅 코스 메뉴를 통해, 손님이 한식의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또한 정식 오픈을 앞두고 ‘캐주얼 레스토랑’에서 ‘파인 다이닝’으로 급선회한 데는, 문화적 이해에 대한 맥락도 반영돼 있었다. “저희가 의도한 대로 단품 메뉴를 제대로 제공하려면, 손님이 어떻게 메뉴를 주문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성인지 알고 있어야 해요. 한국인 손님이라면 어느 정도 감이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Hansik Goo(한식 구)’는 해외(홍콩)에 있는 레스토랑이잖아요. 그래서 각각의 디시를 저희가 직접 짠 메뉴의 흐름대로 제공하면, 손님에게 한식의 진수를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는 “한국 사람은 밥상에서 음식의 양보단 완벽한 조합을 더 중시합니다”라며, 홍콩에서 경험한 중식 역시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한상 가득 차려진 밥상에서 ‘풍성함’이 와닿으려면 고기와 채소의 진하고 담백한 맛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 즉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잘 고르는 것도 문화적 이해가 필요한 하나의 기술이란 거다.
“우리나라 고깃집에 가면 메뉴판에 꼭 냉면이 있어요. 이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한국 사람은 고기와 냉면을 함께 먹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외국인은 아마 그렇게 주문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어머니 식당과 밍글스, 마마리 마켓에서 완성된 감각과 자질

강민구 셰프가 이끄는 ‘밍글스’는 요리사로 막 첫발을 뗀 박승훈 셰프를 모던 한식의 세계로 인도한 곳이었다.
박승훈 셰프의 한식에 대한 감각은 타고났다고 할 만큼 자연스럽게 길러지고 무르익었다. 가까운 친척 대부분이 요식업에 종사했고, 어머니도 식당을 운영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집 아래에 있던 식당에서 자주 어머니를 도왔고, 의무적으로 해야만 했던 주방 일에서 점차 흥미를 느꼈다. 이후 경민대학교에서 호텔조리학을 전공하며 요리 실력을 다졌고, 졸업 후 밍글스에 입사하며 모던 한식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렇게 어머니 곁에서 식재료를 손질하던 소년은, 새로운 지점에 올라서면서 몸으로 직접 부딪쳐가며 익힌 식문화와 전통 한식을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됐다.
전통 한식을 모던한 디시로 재해석하는 밍글스에서의 경험은 전통 요리를 향한 열정을 일깨웠다. 그리고 다음 행보로 파인 다이닝 업계에서 커리어를 이어가지 않고, 한식의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마마리 마켓’(현재는 유로피언 스타일 코리안 델리 마켓을 표방하며, 한식 중심의 마마리 마켓과 마마리 반찬 펍으로 나눠 레스토랑과 테이크 아웃 전문점을 병행하고 있다.)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밍글스에서 한식 반상 파트 R&D 팀장으로 있었던 송하슬람 셰프(넷플릭스 시리즈 <흑백 요리사>에서 Top 15까지 올라간 ‘반찬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제철 지역 식재료를 발굴해 특색 있는 한식 요리 반찬을 선보이는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었다.
“마마리 마켓은 한식(요리) 반찬 전문점이었기 때문에 식당이 아니니까 요리하고 포장만 하면 됐어요. 서비스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계속 요리만 파고들어 연구할 수 있었죠. 저에겐 정말 좋은 기회였고 필요했던 트레이닝 시간이었어요.”
박승훈 셰프는 책으로 익힌 전통 요리를 실제로 테스트해 보고, 그날그날 오늘의 특선 메뉴를 정하던 순간을 지금도 소중한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다. 가정식 한식에 심취해 순수하게 요리만 하던 그때는, 한식에 대한 감각을 쌓을 수 있었던 전무후무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요리의 혁신은 허공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깊이가 쌓인 전통에서 시작될 때 설득력을 갖는다. 이렇게 기본 원리를 따라간 밀도 있는 여정은 그의 머릿속에 한식 관련 데이터 베이스를 단단히 축적케 했고, 훗날 한식 구의 헤드 셰프로서 자리를 잡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백김치와 배의 조합은 전통 한식에서 클래식한 궁합을 대표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결과물인 ‘백김치 냉채’는 한식 구의 대표 디시로서, 차가운 전채 요리를 한식 스타일로 섬세하게 풀어낸 예다. 박 셰프는 한식에서 냉채가 다양한 절임 채소나 해산물을 함께 써 만들 수 있음을 참고했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책임지고 구성한 코스 메뉴에 클래식한 조합인 ‘백김치’와 ‘배’를 소재로 택했다. 전통 한식의 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만의 킥으로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의 전복 슬라이스를 더해 바다의 풍미를 올리며 풍요로운 맛의 하모니까지 구현했다.
하나 더 주목할 만한 건 조리법. 전복을 데칠 때 타피오카 가루를 넣어 전복의 매끄러운 식감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사실 이건 일반 가정에선 거의 쓰지 않는 궁중 요리(한식) 방식이에요. 한국에 파인 다이닝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참고할 수 있었던 게 결국 궁중 음식이었죠.”라고 말했다. 양념은 복잡하지 않다. 청량한 백김치 국물에 배즙과 식초를 약간 더하면 완성. 그리고 고명으로 마지막에 석류 몇 알을 올려 붉은 색감을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단정한 맛이며, 사용된 재료와 풍미, 시각적인 구성까지 모두 ‘한국적인 것’으로 잘 이뤄져 있다.
다음 목표, 한식의 고정관념을 깨고 저변을 넓히는 일

박승훈 셰프는 한식 구를 통해 한식의 다채로운 면모를 더 구체적이고 밀도 있게 전하고 있다.
밍글스 강민구 오너 셰프는 홍콩으로 진출하면서 박승훈 셰프에게 ‘한식 구’의 수셰프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해외 경험도 전무하고, 외국어도 서툴며, 주방 전체를 운영해본 경력도 없었던 박 셰프는 마마리 마켓에서 쌓은 실력을 고급 한식에 적용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이 막중한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결같이 자신만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한식 구’를 이끌어왔다.
몇 년 사이 빠르게 주방에서 마주한 여러 도전을 하나씩 극복해가며 성장한 그는 ‘한국 음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일’을 현재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한식이라고 하면, 외국인들은 보통 바비큐나 치킨처럼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한식 구에선 한국 음식의 다채로운 면모를 더 구체적이고 밀도 있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것이 궁극적으로 저와 저희 팀이 지향하는 가치입니다.”
그가 헤드 셰프로서 첫 선을 보인 ‘게살 잣즙탕’도 인상적이다. 전통 탕 요리의 원형을 살려 맵지도 진하지도 않고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많은 이들이 미처 상상치 못한 ‘온화한 한식’의 캐릭터를 섬세하고 간결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 식문화에선 고급 견과류인 잣을 냉채 소스나 우아한 탕 요리의 베이스로도 사용하고 있다.
‘게살 잣즙탕’에 쓰인 해산물과 견과류는 일반 한식에선 흔치 않은 조합이지만, 그는 궁중 요리에서 영감을 받아 잣즙탕과 게살의 이색적인 하모니를 꾀했다. “잣의 고소한 향과 게의 감칠맛이 굉장히 잘 어울리거든요”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맛의 조합을 자연스럽게 따랐다고 설명했다. 탕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게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눈꽃게’의 살을 발라 넣어 신선하고 섬세한 맛을 살렸고, ‘털게’ 살은 다진 다음 완자로 빚어 식감의 재미까지 주었다. 특히 부드럽고 포슬한 식감에 진한 맛을 지닌 완자는 따끈한 탕과 잘 어울린다.
이처럼 박승훈 셰프의 게살 잣즙탕은 가벼움과 진함이 리드미컬하게 공존하며, 각 게살이 지닌 개성이 절묘하게 드러난다. 이 레시피는 전통 궁중 요리와 민가의 조리법을 조화롭게 엮었다. 다시 말해 간결한 디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고민의 흔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그의 손을 거친 이 한 그릇은 한식의 다채로운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궁중 요리에서 영감을 받은 잣즙탕을 토대로 견과류, 게살과의 하모니까지 꾀했다.
정통성을 살리면서 한국인에게도 이상적인 한식
한식 구에 처음 합류했을 때, 박승훈 셰프의 역할은 전 헤드 셰프를 보좌하며 주방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호주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종의 서구적인 한식을 선보였고, 이후 박 셰프가 단독으로 주방을 이끌면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메뉴를 풀어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자랐고 또 서울에서 요리를 해온 그는 조리 기법은 물론 플레이팅에도 정통 한식을 제대로 선보이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 디시인 ‘제철 생선 구이’ 에도 전통 한식 문화의 요소를 속속들이 녹여냈다. 겨울철에 맛이 절정에 오르는 제주산 금태는 기름기가 풍부해 강한 맛의 양념과 잘 어울린다. 그는 이 생선을 필레 형태로 손질해, 한식의 3대 장(밍글스에선 이를 활용한 ‘장 트리오’ 메뉴가 시그니처다.) 중 하나인 고추장 베이스 양념을 활용해 잘 재웠다. 이 둘의 하모니는 감칠맛 끝판왕으로, 매콤달콤한 맛과 발효의 풍미가 금태 본연의 단맛을 끌어올리면서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특히 외국인에게 짜고 자극적인 인상을 주는 고추장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며,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양념을 통해 신선한 자극과 의미 있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제철 생선 구이’에선 짜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고추장을 생선 특유의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세련된 양념으로 활용했다.
이 디시를 꼼꼼히 살펴보면 제주산 금태 필레 아래쪽으로는 간장에 절인 갓을 놓았고, 액젓을 더해 상큼하게 무친 포항초는 가니시이자 나물 반찬처럼 곁들여 냈다. 실제로 나물은 한국 식탁에선 결코 빠질 수 없는 건강하고 일상적인 반찬이다. 무엇보다 박승훈 셰프는 정통 한식의 뿌리를 고수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며, 코스 요리에 맛깔스러운 나물을 상징적으로 넣었다. 이처럼 그는 소박한 한식 재료로 전통의 결을 유지하면서도 섬세하게 메뉴 하나하나를 구현해냈다. 또한 여기에 잘 데친 북방조개를 더해, 부드러운 생선살과 대비를 이룰 쫄깃한 식감을 보태고 감칠맛의 밀도도 끌어올렸다.
이제 그의 목표는 외국인들이 가진 한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실현하려는 건 해외에서도 한국인에게 인정 받는 한식을 만드는 것이다. 한식이든, 이탤리언 요리든, 프렌치 요리든, 본고장을 떠나 해외에서 레스토랑을 오픈하면 본연의 맛을 제대로 내기도 힘들고, 그 맛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또 기존 식자재와 다른 걸 쓰다 보니 퀄리티도 달라지며, 가격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해외에 거주하는 대개 한국인들은 외국에서 맛보는 한식에 대해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한식 구’가 식사 비용 면에선 손님들에게 경제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만큼, 박승훈 셰프는 ‘한식 구’를 통해 정통 한식으로서의 맛과 퀄리티, 철학을 원형 그대로 선보이려 애쓰고 있다.
“제가 꼭 이루고 싶은 건 한식의 실제 모습을 반영하면서도, 한국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한식’을 대접하는 거예요. 기꺼이 돈을 내고 사 먹고 싶은 ‘한식’을 만들려는 거죠”라며 앞으로의 바람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