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ale Chefs Series -2] 셰프로서의 자질과 능력으로 세운 정체성

Beyond the Label : ‘섬세하다’는 고정관념을 넘어 각자 고유한 요리 철학과 스타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뛰어난 셰프’로 평가 받기를 지향한다.

우리는 여성 셰프를 이야기할 때, 왜 ‘셰프’란 호칭 앞에 ‘여성’을 붙여 성별을 강조하는가? 이 질문을 토대로 그간 여성 셰프들이 주방에서 겪어온 구조적 긴장감, 유연하게 자리 잡은 리더십의 형태, ‘여성스럽다’란 표현의 이중적 잣대 등을 살펴보려 한다. 현 시점에서 ‘셰프’란 이름 앞엔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고, 오늘의 주방은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섬세하다’란 표현의 양면성

남성이든 여성이든 뛰어난 자질을 갖춘 셰프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는 여성 셰프의 요리에 대해 깊이 있는 평가를 방해하기도 한다. 프란로칼의 엄현정 셰프는 섬세함이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은 와인을 설명할 때도 ‘페미닌(feminine)’하다는 표현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로 ‘여성 셰프의 요리라서 섬세한 것 같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는 편인데, ‘섬세함’의 영역을 젠더로 구분 짓고 싶지는 않아요. 해외에서 함께 일한 동료 중에도 덩치가 산만한 스웨덴 남자 셰프가 ‘섬세함’의 영역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었고, 작은 체구의 프렌치 여성 셰프가 디테일한 표현에 약한 경우도 보았으니까요. 여성 셰프란 이유보단, 개인의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가겐의 최현아 셰프는 “좋은 요리를 추구한다면, 섬세함은 성별과 무관하게 요리사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에요. 사려 깊음이 고객에게 감동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매일 일하기 때문이죠. 단순히 요리의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는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평가로 여성 셰프를 섬세하다고 표현한다면 안타깝지만, ‘부드럽고 따뜻하다’란 감성을 담은 뜻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결국 요리는 감정을 담는 일이니까요”라고 답했다.

소울 다이닝의 김희은 셰프도 이 표현에 대해 양가적인 심정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섬세하다’는 말에 담긴 은근한 고정관념이 먼저 보였어요. 마치 여성 셰프는 요리의 모양을 내는 것에만 몰두하거나 얕은 맛을 낼 것이란 인식에서 오는 표현이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을 날카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섬세함은 요리사에게 분명히 칭찬이거든요. 단지 시각적인 표현이나 스타일을 넘어 맛의 구조를 어떻게 조율하고, 맛과 향에 대한 레이어를 얼마나 정교하게 쌓느냐에 대한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핵심은 저는 요리를 섬세하게 구상하지만, 이것이 여성성의 표현은 아니란 점이에요. 힘 있고 직관적인 맛과 간결한 플레이팅은 섬세함과 반대되는 가치나 개념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요소를 모아 오랜 시간 집중하고 고민한 다음 결국 결과물을 내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해 고객이 저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디테일을 느낄 수 있도록 요리를 디자인하고자 해요. 즉 성 정체성을 넘어 제 스스로 어떻게 요리를 하고 표현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죠.”

소울 다이닝(Soul Dining) 김희은 셰프는 자신의 요리를 통해 힘과 직관을 섬세함과 어우러지게 표현한다.

앞서 언급한 여성 셰프 3인의 섬세함은 동일하지 않고, 각 셰프가 체화한 정체성과 요리 철학 속에 다채롭게 발현된다. 가겐에선 이러한 섬세함이 가족을 위한 마음 같은 정직함과 온기로, 소울 다이닝에선 기억과 접시의 시각적 미감으로, 프란로칼에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재료의 생명 감각으로 구체화된다.

셰프로서의 정체성을 요리로 번역한다는 것

최현아 셰프는 가겐에서 선보이는 요리를 “일본 요리의 정교함 위에 한국인의 정을 담은 한 접시”라고 말한다. 도쿄 미쉐린 3스타 ‘칸다’에서 갈고 닦은 기술은 높은 퀄리티 너머에 숨은 따뜻한 마음을 배우는 일이었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최 셰프는 가족에게 요리하는 마음으로 정직함을 담는다. “저는 기술적인 완성도만큼 ‘정서적인 연결’도 중시합니다. 손님이 어떤 기분으로 식사를 맞이하는지를 상상하고, 이러한 감정에 어울리는 음식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음식의 구성에 대해 보다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죠.”

양평의 팜투테이블 레스토랑 프란로칼을 운영해온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앞으로의 방향을 계획하고 있는 엄현정 셰프는 자신을 ‘반농반요(半農半料)’라 부른다. 반은 농부, 반은 요리사라는 뜻. 요리를 직업으로 삼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엄 셰프의 요리 철학은 여러 번 재정의되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좋은 식재료를 가장 나답게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기술을 쌓고 공부하고 매일 정진하며, 그녀가 찾은 해답은 식재료를 직접 기르고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즉 매일 밭에서 작물의 성장을 관찰하고 이해해야 그 맛의 미세한 차이를 접시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재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결국 직접 농사를 짓게 되더라고요. 사계절이란 말이 있지만 사실 작물은 하루하루 달라져요. 계절의 온도, 습도, 일조량, 강수량 등 자연의 힘에 따라 생명체들의 성장 속도도, 이에 따른 미묘한 맛과 식감의 변화도 생깁니다. 매일 맛이 다르다는 것을 밭에서 시작하는 아침으로 터득한지 수년째, 저는 밭작물과 대화하며 요리하고 있어요.”

프란로칼(Franlocal)의 엄현정 셰프는 직접 재배한 식재료로 요리를 빚어내며, 밭에서 식탁까지 자연의 순환을 담아왔다.

소울 다이닝 김희은 셰프는 자신의 요리를 ‘통역’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의 전통과 기억을 지금의 언어로 해석하고 번역하는 일. 도예에서 시작한 미감은 접시의 감촉과 형태에서부터 출발하고,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그녀의 요리를 하나의 시(詩)로 만든다. 하지만 언제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쉬웠던 건 아니다.

“가장 정밀한 균형을 찾기 위해 더하거나 덜어내며 혼란을 겪기도 하고 나만의 방법을 찾으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많은 정보로 인해 오히려 제 색을 잃을 수 있어 이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죠. 결국 제가 만드는 요리는 한국적인 재료와 기억을 지금의 언어로 통역하는 일입니다. 한국의 다양한 식문화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위트 있게 표현하며 고객과 소통하고,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공감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에요.”

고정관념을 허무는 셰프로서의 자질과 능력

“요즘은 젠더리스가 대세잖아요? 성별과 상관없이 직업군인 ‘셰프’로서 평가 받고 싶은 욕심이 더 큽니다.” 엄현정 셰프는 찬사처럼 사용되는 말도 고정관념의 틀이 될 수 있기에 ‘여성 셰프는 이렇다’라는 범주화를 경계한다. 동시에 그녀가 여성으로서 느낀 개인적인 강점도 있다. “제가 요리사로 전향하기 전, 디자이너로 5년 정도 일을 했어요. 그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힘을 빼는 기술이었죠. 어쩌면 이 능력은 여성이 더 강한 것 같기도 해요. 셰프로서 ‘여성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힘을 빼고 절제하는 매력’을 접시에 담을 줄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접시에 우르르 쏟아내지 않고, 하나씩 천천히 내어 보일 줄 아는 절제력이야말로 제가 가진 ‘여성성’이 바탕이 되었을 때 힘을 갖는 것 같아요.”

김희은 셰프는 여성이란 사실을 포용하며, 더 큰 의미를 찾아 나가고 있다. “저는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쌓은 감정과 기억, 습관이 자연스럽게 제 요리에 스며 있다고 느껴요. 이런 특성이 어떻게 요리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저와 함께 소울 다이닝을 운영하는 제 남편, 윤대현 셰프를 만나고 더 명확해졌어요. 윤대현 셰프는 구조적이면서 이성적인 스타일로 요리를 기술적으로 설계하고 결과를 명확히 그려내는 편이라면, 저는 보다 직관적인 감각을 선호하면서도 메뉴가 탄생하기까지 스토리와 이유를 찾는 편이에요. 맛과 경험, 스토리텔링까지 손님과의 공감대가 잘 형성될 수 있도록 유기적인 접점을 찾아 나가죠.”

이러한 김 셰프 특유의 섬세함과 유연함은 윤대현 셰프의 힘있는 조형감과 어우러지며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색을 발한다. 감정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김 셰프 특유의 감각과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녀가 지닌 강력한 무기다. “의식적으로 저를 여성 셰프라고 규정하고 싶진 않아도 이를 부정할 이유가 없는 자연스러운 본질이기에 제 일부로서 받아들입니다. 제가 얻은 감각과 시선,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제 스타일과 철학을 만들었으니, 성별의 ‘정체성’이 아닌 ‘고유성’으로 바라봐 주시길 바랍니다.”

가겐의 최현아 셰프는 ‘여성 셰프라면 이런 스타일이겠지’ 하는 고정관념을 마주할 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제 누구나 음식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즉 독립적인 철학과 스타일, 감각의 서사는 개인의 개성으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가겐(Gaggan)의 최현아 셰프, 고정관념을 넘어 오롯이 요리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세 셰프는 공통적으로 ‘고유성’을 강조한다. 엄현정 셰프는 요리를 통해 “수확한 채소의 이슬과 햇빛, 토양의 감촉”을 느끼게 하려 한다. 최현아 셰프는 담백하지만 흐름 있는 국물 요리에서 가장 자신다움을 발견하고, 김희은 셰프는 영감이 공감으로, 공감이 소통으로 이어질 때 가장 ‘나답다’라고 느낀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은 단지 맛이나 온도, 텍스처를 넘어 ‘기억에 오래 남는 여운’이다. 한 끼 식사가 기억 속의 좋은 순간으로 남는 것. 그것이 셰프로서, 그리고 창작자로서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요리다.  

뛰어난 셰프로 서다

엄현정 셰프는 ‘여성’이란 단어 앞에 붙일 수식어가 있다면, 그것은 ‘뛰어난’이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다이닝 신(scene)에 여성 셰프가 많지 않다 보니, 여성 셰프는 디저트를 만들거나 가정식 위주의 음식을 하거나 쿠킹 클래스에서 주부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다수였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한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저도 한 명의 여성 셰프로서 잘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었죠. 그래야 후배들이 더 편견 없고 평등한 세상에서 활동하며, 타고난 성별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줄어들 테니까요. 요즘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느껴요. 요리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흐름이 있으니까요. 다들 그렇겠지만 저흰 ‘뛰어난 셰프’란 말을 듣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하고 있어요.”

김희은 셰프는 ‘여성 오너 셰프’로서의 무게감이 더 크다고 말한다. 공간 운영, 팀 빌딩, 브랜드 설득력까지 모두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이 ‘여성성’이 아닌 ‘오너십’으로 드러날 때,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지향하는 ‘여성 셰프의 자격’을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는 요리와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설득력 있는 오너십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제 오너 셰프 경력 6년 차에 접어 들었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느끼지만, 조금씩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면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진짜 여성 오너 셰프의 자격이구나란 믿음이 생겨요.”

최현아 셰프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에도 얽매이지 않길 바란다. 여성 셰프란 정체성을 숨기지도, 과도하게 소비하지도 않는 방식. 다만 그것이 음식에 온기와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면, 기꺼이 껴안겠다고 말한다.

단락

Writer 이정윤(Julia Lee)
Photographer 이정윤(Julia Lee)
Copy Editor 마비스(Mavis)
Photo Credit 가겐(Gaggen), 소울다이닝(Soul Dining), 프란로칼(Fran Lok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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