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Women Lead : 권위 대신 신뢰·자율·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주방을 운영하고, 한국 파인 다이닝 리더십의 새로운 언어를 써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여성 셰프를 이야기할 때, 왜 ‘셰프’란 호칭 앞에 ‘여성’을 붙여 성별을 강조하는가? 이 질문을 토대로 그간 여성 셰프들이 주방에서 겪어온 구조적 긴장감, 유연하게 자리 잡은 리더십의 형태, ‘여성스럽다’란 표현의 이중적 잣대 등을 살펴보려 한다. 현 시점에서 ‘셰프’란 이름 앞엔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고, 오늘의 주방은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각자 터득한 운영 방식으로 자신의 레스토랑을 일군 리더십
서울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세 곳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드레스덴 그린’, ‘명보당’, ‘더 그린 테이블’. 이곳들은 모두 여성 셰프가 이끌며 저마다의 여정을 펼쳐가고 있다. ‘명보당’은 회사를 대신해 임현주 셰프가 브랜드를 인수했고, ‘드레스덴 그린’은 박가람 셰프가 직접 나서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브랜드를 되살려야 했으며, ‘더 그린 테이블’의 김은희 셰프는 일체 외부의 도움 없이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지난 20년 간 레스토랑을 책임져 왔다.
이들의 각기 다른 결정엔 ‘경영 전략’외에도 수많은 고민이 숨겨져 있다. 오너 셰프로, 헤드 셰프로 시장의 리스크 앞에 이름을 드러내며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먼저 김은희 셰프는 2009년 ‘더 그린 테이블’을 오픈하고 16년의 시간을 촘촘히 채워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셰프 본인이 직접 창업하고 운영해 온 공간으로, 두터운 단골을 만들며 안정적인 파인 다이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여전히 매일 조리복을 입고 주방에 서며, 팀을 가르치고, 식재료를 공부하고, 레스토랑의 브랜드력과 정체성을 고민하며 늘 최신의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해 왔다.
또 그는 오너 셰프로서 레스토랑 설립과 이전, 조직 재편, 메뉴 구성,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까지 처리하며, 조용한 리더십으로 다양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팀을 이끌어 왔다. 외부 투자 없이 셰프 개인의 감각과 책임으로 유지한 지난 시간은 일찌감치 정립한 셰프의 철학을 매일 실천해 온 ‘지속의 미학’이다.
한편 박가람 셰프의 ‘드레스덴 그린’은 외식 기업이 만든 브랜드에서 출발했다. 기업의 색과 자본의 의도가 결합해 기획된 공간에 그가 총괄 셰프로 합류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기업이 경영 위기로 문제를 겪으며, 드레스덴 그린은 존폐 여부를 고민해야 했다. 이 시점에 그는 ‘주방의 리더’를 넘어 ‘브랜드의 리더’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는 새로운 투자자를 만났고, 팀을 재정비해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켰으며, 셰프가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시스템을 일궜다. 외부에서 보면 단순히 ‘운영권 이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에겐 엄청난 도약이었다.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이 그에게 오고, 음식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공간과 고객, 영업 관련 세세한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중국인을 포함해 점차 늘고 있는 해외 고객에게 진심을 전할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중국인 직원이 없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어 메뉴 카드와 안내 브로슈어를 제작하는 등 서비스의 디테일을 높여 입소문이 났다. 특히 이토록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한 해외 고객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드레스덴 그린을 찾게 만들었다.
임현주 셰프의 ‘명보당’ 역시 처음엔 셰프 개인의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드레스덴 그린’과 같은 외식 기업의 기획 아래, 그는 고용된 총괄 셰프로 부임했다. 여기서 그는 그간의 숙련된 감각과 회사의 지원이 결합해 크게 주목 받았지만, 크고 작은 브랜드 위기와 기업의 경영난으로 존폐 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에 그는 개인으로서 레스토랑을 인수하며, 고용된 셰프의 위치에서 오너 셰프로 역할을 바꿔 냉혹한 현실을 극복했다. 실망과 불신을 마주하고,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는 책임감을 세워 공간의 빈 자리를 묵묵히 채워 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전면화한 선택이었고, 기존의 ‘조리 중심 역할’에서 나아가 브랜드를 이끌고 구조를 재편하며 신뢰를 회복하는 주체로 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현주 셰프는 명보당을 직접 인수하며 책임과 끈기를 보여주었고, 레스토랑은 새롭게 태어났다.
주방은 살아 있는 유기체,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팀의 구조
셰프가 팀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하는지도 리더십의 스타일로 드러난다. 박가람 셰프의 ‘드레스덴 그린’은 총 6명의 인원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주방으로, 완벽하게 유기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담당 파트를 따로 두지 않고 매일 역할을 바꾸며 로테이션합니다. 오늘은 디저트를, 내일은 콜드 파트를 맡는 셈이죠. 이 구조 안에선 갈등이 많이 줄어듭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모두가 한 팀이 되는 저만의 방식이에요. 효율적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서로의 기술과 감각을 공유하는 열린 시스템 속에서 더 좋은 가치가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선배로서 어떤 삶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있어요.”
드레스덴 그린의 박가람 셰프는 주방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고, 로테이션과 공유로 팀을 하나로 묶는다.
임현주 셰프의 ‘명보당’도 비슷하다. “직급도 나누지 않아요. 상황에 따라 누구든지 어떤 포지션이든 맡을 수 있어야 해요. 대신 각자가 맡은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 그녀는 위계보단 책임감이란 내면적 원칙에 집중하며, 개인의 자율과 전문성을 믿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더 그린 테이블’의 김은희 셰프도 매일 같이 직접 주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한 오너 셰프로, 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팀원들이 이미 알 것이라고 짐작하기보단 설명을 최대한 자세하게 해줘요. 하루 일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에게도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줘요. 알아야 잘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팀은 설명, 설득, 공유를 통한 성장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렇듯 세 셰프 모두 비교적 적은 수의 팀원으로 주방을 운영하며, 서로가 하나의 리듬을 만들 수 있도록 팀을 조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또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비위계적인 구조, 유기적 파트 운영, 정서적 안전이 보장된 환경을 전제로 팀을 운영하고 있다. 직급을 크게 두지 않거나 역할을 교차하며, 한 명의 실수에 대해 비난하기보단 맥락과 원인을 분석해 대화로 해결하는 방식을 택한다. 욕설이나 고성은 물론, 이름을 부르며 호통치는 방식조차 이들의 주방에선 찾기 힘들다.
하지만 과연 위계와 통제를 최소화한 부드러운 리더십 체계 아래서도 파인 다이닝이 추구하는 ‘최고의 품질’을 담보할 수 있을까. 고도로 정밀한 결과물이 요구되는 파인 다이닝 씬에서, ‘효율성’과 ‘결과’란 전통적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건 큰 도전 과제가 된다. 역할과 책임의 경계가 흐려질 경우 의사 결정 속도는 느려지고 갈등 상황에선 중심축이 모호해지며, 동일한 실수가 반복되더라도 이해와 타협이 우선시 되곤 한다. 실제로 위계가 분명한 남성 셰프들의 주방에 비해, 유기적 구조를 가진 여성 셰프 팀은 조직의 안정성과 완성도 확보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특히 퀄리티 컨트롤 측면에서 보면, 지속적인 반복과 감정적 긴장이 일정 수준 이상 유지돼야 하는 파인 다이닝 환경에선 ‘느슨한 질서’가 ‘불안정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신뢰로 이끌고, 체계화된 기준으로 원칙을 지킨다
이들의 주방은 이상과 현실, 감정과 질서, 철학과 품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 나간다. 박가람 셰프는 주방 내 권위 유지보다 수셰프의 역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팀 내 질서를 설계한다. 또한 김은희 셰프는 팀원 개개인이 주방의 철학을 이해하고 내면화할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설명을 통해 조직을 다져 가고 있다. 임현주 셰프는 위계 없이도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모든 과정과 결과를 철저히 확인하는 검증의 리더십을 구사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구성원 간 갈등을 최소화하고, 팀 전체의 감정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뛰어난 결과를 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창의적 제안이 활발해지는 등 정서적 개방성이 높아지는 장점도 있다. 김은희 셰프는 “권위보단 신뢰로 이끌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명확한 기준도 제시하려 해요. 직원들이 편한 방향으로만 가면 팀은 성장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다정한 태도로 흔들림 없는 경계를 걷는다.
더 그린테이블의 김은희 셰프에게 리더십은 선명한 기준과 다정함이 공존하는 동행이다.
박가람 셰프는 “기준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때 신뢰가 생겨요. 그게 신뢰의 시작이자 종착점이에요.” 그는 팀원의 실수나 문제점을 자신이 직접 지적하는 대신 수 셰프에게 모든 문제를 전달하고, 그를 통해 조직이 스스로 움직이며 발전할 수 있게 한다. “그게 진짜 신뢰예요. 권위는 신뢰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목적이 되어선 안 돼요.”
임현주 셰프는 권위로 이끌 것인지, 신뢰로 팀원을 믿을 것인지 묻는 이분법 자체에 회의적이다. “권위도 아니고, 신뢰도 아니에요. 저는 모든 일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에요. 강요도, 방임도 하지 않아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건, 리더십은 결국 ‘상황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란 믿음이다.
매일 실패해도 다시 결정하는 리더의 마음가짐
리더십은 단단한 철학의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수정의 누적물이다. 김은희 셰프는 “직원 교육을 너무 민주적으로 하다 보니, 오히려 갈피를 잃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교육은 충분히 하되, 방향은 제가 제시합니다.”라고 말한다. “초보 요리사도 6개월이면 잘하게 만들 수 있어요. 단, 저를 믿고 따라만 온다면요.”
한편 박가람 셰프는 오픈 초기 “모든 걸 내 손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3개월 간 하루도 쉬지 않고 주방에 섰어요. 그런데 그건 팀을 성장시키는 방식이 아니었어요. 내가 놓아야 팀이 자란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지금은 모든 걸 혼자 도맡아 하지 않고, 팀원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리더다. 임현주 셰프도 과거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제어하고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다시 말해 리더십은 감정의 절제가 아니라, 감정 뒤에 있는 구조를 읽는 훈련이란 이야기다.
한국 파인 다이닝의 리더십은 지금, 주방 안에서 새로운 언어로 다시 쓰이고 있다. 그것은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팀을 움직이는 힘이며, 부드럽지만 선명한 기준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힘은 때론 고독하고 외로우며, 자주 오해 받고 평가절하된다. 하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곧 바로 셰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들은 이 결정을 현실 속의 결과물로 빚어내며 고객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