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셰프 특히 이탈리아 셰프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해외에서 요리할 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이탈리아 요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느냐다.
봄이 오면 셰프들은 앞다투어 신선한 각종 재료를 요리에 듬뿍 담아 생기를 전하려 한다. 반면 FRASSI의 이아코포 프라시(Iacopo Frassi) 셰프는 이와는 달리 ‘덜어내는’ 길을 택했다.
“이번 시즌 메뉴는 단순함에 더 집중했어요. 저는 폭발력 있는 맛을 추구해요. 그래서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의 가짓수를 최대한 줄였죠. 최소한의 재료로 풍미를 내면 맛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어요. 결국 손님들은 지금 무얼 먹고 있는지 더 명확히 느끼실 수 있죠. 이게 바로 제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FRASSI의 요리와 식재료엔 이탈리아 특유의 색채와 이아코포 셰프만의 스토리텔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솔직히 제 요리는 이탈리아 가정이나 트라토리아에서 전통적으로 흔히 먹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저만의 방식과 해석으로 풀어내 제 색깔이 많이 묻어 있죠. 사실 해외에서 요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식재료로 이탤리언 스타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현지 제철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스트리트 푸드나 레스토랑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음식에 이탈리아 스타일을 조화롭게 접목하는 것이 이아코포 셰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방향성이다.
훈연과 발효, 동서양의 경쾌한 하모니
본 식사에 들어가기 전 아페리티보(Aperitivo)로 입맛을 돋우는 건 이탈리아 대표 식문화 중 하나다. 이아코포 셰프는 이러한 이탈리아식 식전주를 ‘더티 마티니(Dirty Martini)’ 칵테일로 재해석해 무알콜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은은한 산미를 지닌 초밥용 쌀 누룩에 올리브즙을 섞고, 토스카나 올리브 오일을 몇 방울 더해 짭짤함과 산미로 미각을 일깨우는 것. 바로 이렇게 동서양의 식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레시피를 정립해가고 있다.
훈연한 일본 고등어의 풍미에 발효 토마토 소스의 감칠맛, 바질 콤부차 젤리의 산미가 어우러져 깊은 맛을 낸다.
다음으로 등장한 애피타이저 ‘훈제 고등어 · 토마토 · 바질(Aringa Affumicata)’도 꽤 인상적이다. 이 디시는 이탈리아 전통 청어 조리 방식을 따랐다. 단, 이아코포 셰프는 청어 대신 대만 현지인에게 익숙한 일본산 고등어를 택해 잘 훈연한 다음 깍둑 썰어 타르트 쉘에 채워 넣고, 풍미 깊은 발효 토마토 소스와 바질 콤부차 젤리(푸딩 식감)를 곁들였다. 여기에 탑 토핑으로 잘게 썬 차이브와 캐비어를 올려 봄의 완벽한 하모니를 표현해냈다.
이 디시에서 훈제 고등어는 담백하고 신선한 맛을 내며, 발효 토마토 소스의 감칠맛과 바질 콤부차 젤리의 산미가 어우러져 생선의 비린 맛을 깔끔하게 잡아 준다. 특히 올리브 향이 가득한 웰컴 드링크와 함께하면 봄날의 청명한 바람처럼 상쾌한 산뜻함을 누릴 수 있다.
현지와 토스카나 스타일의 경계를 잇다
일체의 고기나 생선 없이 서로 다른 동서양 식문화의 느낌을 만족도 높게 살린 디시도 있다. 발효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와 보리 누룩을 활용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 보리 누룩 · 파슬리’다.
“타이완 신베이시 산충(三重) 지역의 동파육 덮밥을 정말 좋아하는데, 토핑으로 올라가는 ‘절인 죽순’은 항상 빼달라고 해요. 갓 발효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냄새와 비슷해 제 기호엔 잘 맞지 않았거든요.”
발효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와 보리 누룩은 개별로 디시에 활용되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한 접시에 담겼다.
이아코포 셰프는 상대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 있는 특유의 톡 쏘는 냄새를 잡고자,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1년 간 발효한 뒤 다시 4개월 간 냉장 숙성해, 자극적인 향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효한 아스파라거스 액과 버터를 희석해 소스를 만들고, 보리 누룩 폼을 풍성하게 얹은 다음, 제철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올렸다. 특히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숯불에 살짝 구워 겉바속촉의 식감을 살리면서도 훈연 향을 더했다. 이렇게 완성된 요리는 발효액의 적당한 산미와 버터의 고소함이 섞여 놀라운 감칠맛과 부담 없는 마무리를 약속한다.
특유의 톡 쏘는 냄새를 잡은 발효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다음으로 ‘랍스터 · 차이브 · 아보카도’는 토스카나식 해산물 스튜인 ‘카추코(Cacciucco)’에서 영감을 받아, 농축한 랍스터 육수에 그라나 파다노 치즈를 넣고 저온 조리해 리소토를 만들었다. 특히 이아코포 셰프는 해산물 본연의 풍미를 강조하려, 버터 양을 줄이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적극 활용해 은은한 맛을 내면서 물과 기름을 부드럽게 유화시켜(Mantecare) 크리미한 소스를 완성했다.
여기에 콩피한(Confit) 랍스터 살과 함께 아보카도와 차이브 오일을 더했다. 온화한 허브 향을 머금은 아보카도는 랍스터의 진한 풍미를 부드럽게 감싸고, 전분이 많은 리소토에 촉촉한 질감을 안겨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도 질리지 않게 한다.
진한 랍스터 육수를 머금은 쌀알의 감칠맛은 폭발하며, 여기에 더해진 아보카도와 차이브 오일은 식욕을 자극한다.
토스카나 현지 풍미와 문화를 전하려는 시도, 토끼 라구
이아코포 셰프는 이번 시즌 신규 메뉴 ‘수제 탈리아텔레 · 토끼 · 살사 베르데’를 출시하며, 과감하게 토끼 고기를 사용했다. 대만 로컬 고객에게 자신의 고향 요리를 진심을 다해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토끼 고기를 라구의 메인 베이스로 삼았다. 먼저 토끼 고기를 향신료가 들어간 소금에 수 시간 절인 뒤 염분을 씻어, 수분이 빠지면서 향신료의 풍미가 고기에 배어드는 숙성 과정을 거쳤다. 다음으로 토끼 고기를 콩피한 뒤 뼈를 제거하고, 남은 고기 육즙에 셀러리, 당근, 양파를 넣고 다시 고기와 함께 화이트 와인(Pinot Grigio)을 더해 끓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직접 만든 올리브 페이스트를 더해 감칠맛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토스카나에선 쓴맛이 살짝 도는 올리브를 넣어 요리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요.”
이렇게 잡내 없이 살살 녹는 토끼 라구가 완성되면, 넓적한 탈리아텔레 면을 접시 위에 둥글게 말아 담고 소 골수와 버터로 만든 눅진한 소스를 끼얹는다. 이어 토끼 라구를 담고, 바질과 루콜라로 이뤄진 살사 베르데를 더해 마무리한다.
또 파스타 면 위로는 부드러운 내장 두 점이 올려진다. 큼직한 토끼의 간과 붉은 빛 심장 모양을 닮은 토끼의 콩팥이다. 특히 이아코포 셰프는 토끼 내장을 허브와 마늘로 맛을 낸 동물성 오일에 콩피해, 독특한 식감과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했다.
“토끼 한 마리에 간은 오직 하나, 콩팥은 두 개뿐이에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선 가족끼리 식사할 때 이 부위를 두고 진짜 경쟁을 벌이죠. 그래서 우린 이걸 ‘왕을 위한 맛’이라고도 부릅니다. 가장 맛있는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토끼 고기 라구와 콩피 내장은 이아코포 셰프의 고향인 토스카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 요리다.
짭짤한 감칠맛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시그니처 디저트
한편 FRASSI에선 디저트 셀렉션도 남다르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달콤한 자극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일례로 시그니처 디저트 ‘포르치니 · 올리브 · 호밀’은 짠맛과 감칠맛을 연계해, 평면적일 수 있는 풍미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렸다.
초콜릿 칩으로 둘러싸인 원형 구조를 중심으로 마스카포네 크림, 절인 이탈리아산 올리브, 커피 콤부차 세미프레도, 포르치니 무스와 크런치를 층층이 쌓아올린 다음 흑맥아 사과 소스를 끼얹어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올리브와 포르치니 버섯 특유의 짭짤한 감칠맛이 단맛을 더 배가하는 것이 특징. 손님들이 한입, 한입 머금을 때마다 다층적인 풍미를 경험할 수 있게 했다.
‘포르치니 · 올리브 · 호밀’ 디시는 짠맛과 감칠맛의 조화로 기존 디저트와는 차별화된 입체적인 풍미를 구현해낸다.
이국적 식재료를 활용한 디시로, 대만 미식 씬에 기여하다
이즈음 대만에선 현지 생산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과거엔 낯설고 이국적으로만 여겨졌던 식재료들을 로컬 버전으로 새롭게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이닝 업계와 진보적인 셰프들은 이를 반기며 이들을 적극 요리에 활용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기니폴(Guinea fowl, 뿔닭 혹은 호로새)’이란 새로운 품종의 닭을 활용한 FRASSI의 디시다. 이 닭은 일반 닭고기보다 더 진하고 풍미가 깊은 육향을 갖고 있고, 식감은 오리와 닭의 중간쯤으로 단단하지만 질기지 않다. 실제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에선 고급 가금류로 여겨져 미식 요리에 자주 쓰이는 식재료다.
또한 이번 시즌 이아코포 셰프가 과감히 사용한 식재료, 토끼 고기 역시 고향인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정취를 보여주려는 신선한 시도이자 도전이었다. 이렇듯 외국인 셰프가 현지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문화권 식재료를 들여오며, 현지 음식과 식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연한 테스트를 거듭하면 미식 씬과 다이닝 업계는 조금씩 성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아코포 셰프의 FRASSI가 펼쳐갈 향후 행보를 주목해 볼 만하다.
FRASSI는 현재 자리한 그곳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단순히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절과 식문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이탈리아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