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고메 페스티벌 2026: 미식 순환의 도시, 방콕

무려 26년을 꾸준히 이어 온 방콕의 World Gourmet Festival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식 도시가 어떻게 성장하고 다음 단계를 그려내는지 자신만의 해법을 제안한다.

세계적인 셰프가 몇 명이 오고, 미쉐린 스타는 모두 몇 개인가? 국제적인 미식 행사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숫자다. 올해로 26회를 맞는 방콕의 월드 고메 페스티벌(World Gourmet Festival)에도 싱가포르의 3스타 레스토랑 오데뜨(Odette)의 줄리앙 로이어(Julien Royer) 셰프부터 콜롬비아 보고타를 대표하는 파인다이닝 엘 차토(El Chato)의 알바로 클라비조(Álvaro Clavijo) 셰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빅 네임’ 셰프들이 대거 참여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 글로벌 미식 행사를 셰프 이름과 숫자로 단순화하기엔, 30여년을 바라보며 매해 이어 온 시간에 많은 시사점이 있다.

 

싱가포르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Odette의 줄리앙 로이어 셰프

26년 전에는 세계적인 셰프를 방콕으로 초청하는 것 자체가 화제였다. 하지만 지금의 방콕은 다르다.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아시아 50 베스트(The 50 Best Restaurants Asia)의 1–50위 안에, 방콕의 레스토랑은 무려 아홉 곳이 포함돼 있다. 글로벌 셰프를 불러 ‘해외의 미식’을 선보이려고 하던 도시가, 이제는 세계의 미식가들이 음식을 중심으로 여행을 계획해 직접 찾아오는 목적지가 됐다. 월드 고메 페스티벌이 거쳐 온 길에도, 방콕이 세계 미식의 중심부로 자리잡으며 위상을 정립한 변화의 시간이 녹아 있다.

 

AQUA 바에 게스트 바텐딩으로 참여한 한국의 ZEST 팀

 

미쉐린도, 아시아 50 베스트도 없던 시기 시작된 축제

방콕의 월드 고메 페스티벌은 2000년 시작됐다. 지금은 전 세계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아시아 주요 도시를 오가며 콜라보레이션 행사를 여는 일이 낯설지 않지만 당시의 상황은 달랐다. 미쉐린 가이드가 방콕에 처음 진출한다고 발표한 것은 2017년이고, 아시아 50 베스트가 처음 출범한 것도 2013년이다. 방콕 월드 고메 페스티벌은 오늘날 아시아 미식계를 움직이는 주요 어워드 전부터 글로벌 셰프들을 방콕으로 불러들이는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행사 장소도 흥미롭다. 지금의 아난타라 시암(Anantara Siam Bangkok Hotel)은 2015년까지 포시즌스(Four Seasons Bangkok)로 운영됐고, 그 전에는 리젠트(Regent Bangkok), 처음에는 페닌술라(Peninsula Bangkok)로 출발했다. 흥미롭게도 호텔의 브랜드가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월드 고메 페스티벌은 꾸준히 같은 장소에서 이어지며 호텔 브랜드를 초월한 역사를 이었다. 수년간 같은 이름의 행사를 같은 장소에서 반복하며 셰프와 방콕의 미식가들, 미디어 사이에 신뢰를 쌓고, 방콕의 미식 문화에 기여했다.

 

콜롬비를 대표하는 알바로 클라비조 셰프

 

‘누가 오는가’에서 ‘누구와 만나고 교류하는가’로

20회를 맞았던 2019년은 이 축제가 더욱 확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에는 9개국 16명의 셰프가 참여했고, 초청 셰프의 디너와 마스터 클래스뿐 아니라 처음으로 방콕의 스트리트 푸드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포함됐다. 세계적인 파인다이닝 셰프를 선보이는 데에서 시작한 축제가, 역으로 방콕의 식문화와 현지 셰프를 세계 무대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주 출신 데이브 핀트 셰는 방콕의 보 송비사바, 딜란 존스 셰프와 협업 디너를 선보였다.

이번 2026년에도 활발한 교류가 돋보인다. 세계적인 셰프의 단독 디너 외에도 미식의 만남(Gourmet Encounter)이라는 테마로 다양한 배경의 셰프들이 협업 디너를 선보였다. 싱가포르에서 우드파이어 퀴진으로 원초적인 요리 스타일을 선보이는 데이브 핀트(Dave Pynt)와 오랫동안 태국 음식과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해온 보란(Bo.Lan)의 보 송비사바(Bo Songvisava), 딜란 존스(Dylan Jones)가 한 자리에 모였다. 불 향을 가득 입힌 감자와 스테이크 메뉴와 함께, 태국식으로 여러 향신료를 가득 담아 매콤하게 양념을 입힌 브레이징 비프가 한 플레이트 위에 오르며 맛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찰레 카더, 조지아나 뷰, 에로스 드 아고스티니스 셰프

 

아프리카 베냉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조지아나 뷰(Georgiana Viou)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본토의 맛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에로스 드 아고스티니스(Heros De Agostinis) 셰프, 태국의 풍부한 향신료를 소개하는 방콕의 찰레 카더(Chalee Kader) 셰프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아프리카의 식문화를 담아 푹 삶아낸 부드러운 렌틸에는 캐비아를 더했고, 매콤달콤한 맛의 태국식 생새우 샐러드와 이탈리아 스타일의 송아지 스테이크가 뒤를 이었다.

‘콜라보레이션이 많아졌다’는 사실 뒤에는 미식 씬에서 기대하는 시선의 변화가 엿보인다. 예전에는 유명 셰프가 기술과 명성을 들고 이동하는 스타였다면, 지금의 셰프는 자신이 자란 지역, 사용하는 식재료, 가족과 문화의 기억, 지속가능성에 대한 철학까지 함께 들고 움직이는 문화적 ‘큐레이터’다. 협업을 통해 서로 다른 지역의 음식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비교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조리 언어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과정 자체도 콘텐츠다. 월드 고메 페스티벌이 올해 세계의 맛(The World of Flavours)을 주제로 내건 것도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함께 방콕의 로컬 푸드를 경험하며 대화를 나누는 세계 각국의 셰프들

 

방콕은 어떻게 이런 행사가 가능한 도시가 되었나

이제 아시아에서 세계적이고 명성 높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통적으로 고급 미식의 강자로 생각된 도쿄와 홍콩, 싱가포르뿐 아니라 서울, 상하이, 마카오, 타이베이에도 각자의 뚜렷한 미식 생태계가 존재한다. 방콕도 독특한 개성이 있다. 오랫동안 태국 지역 음식과 중국계 태국 음식, 길거리 음식과 호텔 다이닝, 유럽 출신 외국인 셰프들의 레스토랑, 인도와 일본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요리들이 서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해왔다. 한국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40여곳을 보면 외국인 셰프는 단 두 명뿐이고, 서울의 주요 프렌치, 이탈리안도 대부분 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방콕의 미식적 정체성은 하나의 장르가 다른 장르를 대체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층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만들어졌다.

지금의 방콕 파인다이닝 씬도 마찬가지. 태국 셰프들은 해외에서 습득한 기술을 가지고 돌아와 자국의 식재료와 요리를 재창조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외국인 셰프들은 방콕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장기간 머물며 태국 식재료와 생산자를 자신의 요리에 끌어들인다.

 

세계에서 가장 긴 망고 스티키 라이스(Mango Sticky Rice)로 기네스북 등재에 참여한 셰프들

 

미식 생태계가 건강한 도시

미식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셰프가 서로 교류하고, 생산자가 연결되고, 미디어가 이야기를 기록하고, 해외의 요리사가 다시 찾아오며, 소비자가 새로운 요리를 받아들이는 일련의 순환이 함께 필요하다. 이와 같은 페스티벌은 도시의 ‘소프트 인프라’다. 개별 레스토랑은 평소에 각자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축제 기간에는 한 도시를 구성하는 네트워크로 묶인다.

셰프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주 도시를 넘나들며 콜라보레이션과 팝업 레스토랑을 선보인다. 이제 스타 셰프를 초대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행사의 차별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도시에 올 이유’를 제안하는 것이다. 현지 셰프와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지, 지역의 식재료와 어떤 접점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 만남이 어떤 배움과 교류를 남길지가 핵심이다.

한국은 어떨까? 서울과 부산 등 주요 도시는 - 모든 식문화를 포괄하는 지표는 아니지만 – 대표적인 글로벌 미식 가이드인 미쉐린 가이드를 발간하며 230여곳의 음식점을 소개하고, 그중 46곳이 스타 레스토랑이다. 아시아 50대 레스토랑 리스트에도 서울의 레스토랑이 10% 이상을 차지하며, 100위권 안에는 부산의 레스토랑도 순위에 오르는 등 서울과 부산이 더 이상 국제적인 미식 담론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이번 방콕 행사에서 시사점을 찾자면, 이미 한국에 존재하는 뛰어난 셰프와 식문화, 생산자와 장인, 연구자들을 세계와 반복적으로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셰프가 서울에서 하루 요리하고 떠나는 팝업보다 그 셰프가 한국의 장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지역의 생산자를 방문하고, 한국 셰프와 며칠 동안 함께 연구한 뒤 하나의 결과를 내놓는 방식이 더욱 의미 있다. 그렇게 쌓인 관계가 다시 해외에서 한국 셰프와 생산자를 부르는 연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전반적인 생태계가 된다.

 

26년간 월드 고메 페스티벌 행사가 진행된 공간. 아난타라 시암 방콕

 

스타 셰프보다 오래 남는 인프라

26년간 방콕의 심장, 시암에서 열린 월드 고메 페스티벌은 ‘세계와의 네트워크’를 축적하며 이 도시를 꾸준히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데 기여했다. 매 해, 디너 테이블에 오른 요리들은 금세 사라지고, 참가했던 셰프들의 시그니처 디시도 몇 년 뒤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하지만 방콕이라는 도시가 30년을 바라보며 꾸준히 세계의 요리사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교류하게 하는 장소였다는 기억은, 많은 이들이 이 도시를 다시 찾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번 조지아나 뷰 셰프에게 그랬듯 이 자리가 생전 처음 방콕을, 태국을, 아시아를 찾게 만든 행사였을 수 있고, 어떤 현지 셰프에게는 해외 요리사와 처음 같은 주방을 사용한 계기였을 수 있다. 미디어와 미식가에게도 매년 다시 방콕을 바라보게 만드는 기대를 갖게 한다. 좋은 식재료와 재능 있는 셰프, 뛰어난 레스토랑을 출발점 삼아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관계를 만들고, 정보를 순환시키며, 그 도시의 음식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게 만드는 플랫폼이 되는 것.

 

월드 고메 페스티벌 2026에 참여한 셰프들

한국의 핵심 미식 도시인 서울과 부산 역시 이제 다음 질문을 고민할 시점에 와 있다. 세계가 한국 음식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지금, 세계의 요리와 한국의 요리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대화할 것인지를 설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하루의 행사보다 그 만남이 다음으로 이어지고, 서울이나 부산을 찾은 해외 셰프가 한국의 식재료와 사람을 다시 자신의 주방으로 가져가며, 한국의 젊은 요리사가 그 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는 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26년 전 월드 고메 페스티벌이 시작됐을 때 방콕은 오늘날의 방콕이 아니었다. 미쉐린 가이드도 없었고, 아시아 최고의 레스토랑을 꼽는 리스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월드 고메 페스티벌은 세계의 셰프들을 지치지 않고 매해 초대해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세계적인 셰프들이 방콕에 오는 이유는 매력적인 방콕의 음식, 미식 생태계와 만나기 위해서다. 이는 한 도시가 진정한 미식 도시로 성장했다는 가장 흥미로운 증거 아닐까.

단락

Writer 이정윤(Julia Lee)
Editor Mingchu Korea
Photographer World Gourmet Festival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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