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World Gourmet Festival에 게스트 셰프로 참여한 허니비 서울의 조은정 파티시에는 한국의 계절과 재료, 자신만의 형태와 맛의 균형을 통해 지금 서울의 풍경을 방콕의 테이블 위에 펼쳐 보였다.
방콕 아난타라 시암 호텔의 라운지, 더 로비(The Lobby)에 설치된 허니비의 테디베어
방콕의 중심에 도착한 서울의 테디베어
2026년 10월 첫째 주, 방콕 아난타라 시암 호텔의 라운지, 더 로비(The Lobby)에 특별한 손님이 등장했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은정 파티시에의 시그니처 테디베어가 거대한 쇼피스로 변해 로비 한가운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귀여운 곰을 둘러싼 공간은 작은 정원처럼 꾸며졌고, 꽃 사이사이에는 초콜릿과 약과, 마시멜로, 젤리 등 작은 다과가 놓였다. 손님이 마치 벌처럼 꽃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골라 먹도록 만든 구성이다. 브랜드 이름 ‘허니비(Honeybee)’에서 시작된 장난기 어린 상상이 실제 공간으로 확장된 셈이다.
작은 다과는 미니 정원에 배치되어 손님들이 하나씩 맛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올해 26회를 맞은 월드 고메 페스티벌(World Gourmet Festival)은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아난타라 시암 방콕에서 열린 행사다. 세계의 맛(The World of Flavours)이라는 주제에 맞게 칠레부터 독일, 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셰프와 방콕의 요리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 서울의 조은정 파티시에는 허니비 서울로 참여해 고메 애프터눈 티 세트를 선보였다.
세계적인 셰프들의 디너가 연이어 열리는 페스티벌에서 유일한 페이스트리 셰프로 한국의 파티시에가 사흘간 독립된 애프터눈 티 행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더욱 특별하다. 이 자리에서 조은정 셰프는 ‘한국적인 디저트’를 보여주되, 세련된 위트와 자신만의 해석을 더했다.
월드 고메 페스티벌에 참여한 조은정 셰프
한국적인 디저트란 무엇일까
방콕에서 직접 만난 조은정 셰프에게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을 물었다. “요즘 해외에서 이런 작업을 할 때는 한국적인 걸 좀 더 많이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녀가 말하는 ‘한국적’이라는 단어의 중심에는 재료가 있다. 대추, 된장, 오미자처럼 한국 식문화에서는 익숙한 재료와 맛을 프렌치 파티세리의 기술 안에 어떻게 자연스럽게 넣을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번 방콕 행사만을 위한 일회성 아이디어가 아니라 최근 해외 마스터클래스와 프로젝트에서도 계속 이어온 고민이기도 하다.
조은정 셰프의 작업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 접근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 École Lenôtre에서 제과를 공부했고, 서울 라보카(La Bocca)에서 파티시에이자 프로덕션 매니저로 일했으며 미국 Park Hyatt Aviara에서도 경험을 쌓았다. 2013년 베이킹 스튜디오 허니비케이크를 시작했고, 2023년에는 한남동에 허니비 서울 숍과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후 아이스크림을 중심으로 한 아우치(OUCH), 디저트 브랜드 터치(TOUCH)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오랜 시간 프랑스 제과의 기술을 기반으로 일해왔지만 최근 본인만의 개성있는 작업을 설명하며 ‘한국 식재료를 활용한 프렌치 디저트’라는 정체성이 더욱 명료해졌다.
그렇다면 한국 디저트는 반드시 전통적인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할까. 방콕에서 조 셰프가 준비한 테이블을 보면 답은 조금 달라진다. 곰 모양의 무스 케이크도, 과일을 닮은 바스켓도 외형만 놓고 보면 전통 한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한국의 계절과 식재료가 나타난다. 조 셰프는 자신이 이미 구축한 현대 파티세리의 문법 안으로 한국의 맛을 엮어낸다.
행사에서 선보인 허니비 서울의 애프터눈 티
가을에서 겨울로, 서울의 계절을 옮기다
이번 애프터눈 티 메뉴를 구성하며 조 셰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적인 재료’와 ‘계절’이었다. 서울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데서 출발해 알밤과 곶감, 곧 제철을 맞는 제주 감귤을 비롯한 시트러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여러 디저트와 세이보리를 연속해서 먹어야 하는 애프터눈 티의 특성을 생각해 어느 한쪽으로 무겁게 기울지 않도록 전체적인 맛의 흐름을 조절했다.
조 셰프는 오랫동안 제철 과일을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 왔다. 그녀의 대표 메뉴이기도 한 과일 바구니(Fruit Basket)는, 바스켓이라는 같은 형태를 유지하면서 계절에 따라 내용물이 바꾸어 내는 시리즈다. 봄의 산딸기와 라즈베리, 여름의 자두, 가을의 사과와 유자, 겨울의 딸기처럼 제철 과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에 어울리는 향신료나 허브, 젤리, 크림을 조합해 매 순간 다른 맛을 만든다. 2021년 출간한 『허니비케이크의 사계절 디저트』 역시 제철 식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상태에 따라 레시피를 조정하는 과정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다섯 가지 디저트 중, 가장 대표적인 6시 방향의 는 귤과 패션프루트에 은은한 자스민 향을 더해 한국의 겨울을 담아낸 과일 디저트다.
이번 방콕 행사의 디저트도 밤과 곶감, 제주 시트러스도 ‘한국에서 온 재료’를 넘어, 태국과는 또 다른 한국의 계절을 전하는 중요한 요소다. 오랫동안 계절에 맞춰 디저트를 구상하고 만들어 온 파티시에가 해외 무대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선택한 현재의 한국 풍경이기도 한 셈.
“그리고 최근 해외 행사를 할 때마다, 손님들에게 한국 재료를 소개해 드릴 때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세요. 한국 재료들 이름도 많이 물어봐 주시고, 원래 어떤 맛인지도 궁금해하시고요. 덕분에 저희도 자연스럽게 여러 배경을 설명해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조 셰프는 이런 고객 트렌드에 맞추어, 한국적인 재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더 온전하고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을지 화두로 삼아 메뉴를 구상한다.
디저트 플레이팅 중인 조은정 셰프
가볍고 산뜻해 더욱 기분 좋은 디저트
조은정 셰프의 디저트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가벼움(lightness)’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저당, 저지방 디저트가 부상하고 있지만 그녀의 스타일이 트렌드 때문에 변화한 것은 아니다. 때로 페이스트리 셰프들 사이에서는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는 진한 프랑스산 생크림을 의도적으로 덜 사용하고, 국산 생크림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텍스쳐와 맛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원재료의 맛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조합과 밸런스를 추구한다. 그녀에게 좋은 디저트는 지방이나 설탕의 강도로 입안에 남는 묵직한 풍요로움을 만드는 것보다 과일과 원재료의 맛이 입안에서 선명하고 맑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다.
조 셰프의 대표 메뉴이기도 한 프루트 바스켓 시리즈는 설탕의 단맛을 줄이고 과일의 향과 산미를 중심에 둔다.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과 여러 구성 요소 사이의 균형이 핵심이며, 맛과 시각적 즐거움 사이의 밸런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요소를 줄이고 원재료 자체를 선명하게 만드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아난타라 시암 방콕 팀과 협업 중인 조은정 셰프
서울을 떠난 주방에서
조 셰프는 해외 프로젝트에서 가장 까다로운 변수 중 하나로 과일과 유제품을 꼽는다. 같은 브랜드의 유제품도 수입되는 국가나 계절에 따라 향과 질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고, 한국에서 즐겨 사용하는 비교적 가벼운 생크림과 동일한 결과를 내기도 어렵다. 그래서 필요하면 우유를 섞거나 지방 함량이 다른 크림을 블렌딩해 자신이 원하는 질감을 다시 맞춘다.
설비는 더욱 직접적인 문제다. 이번 사흘간의 이벤트를 위해 200인분의 디저트를 준비하는 시간은 하루에 불과했다. 테디베어나 바스켓처럼 몰드에서 형태를 완전히 빼내야 하는 무스 디저트는 충분히 단단하게 냉동되지 않으면 작은 온도 변화만으로 표면과 형태가 무너질 수 있다. 급속냉동고의 성능과 주방의 작업 속도는 디자인의 완성도와 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조 셰프는 일부 재료를 한국에서 직접 가져왔고, 현지 주방 환경에 맞춰 제작 과정도 조정했다.
빈틈없이 완성된 디저트만 보면 이런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테디베어가 참 귀엽다’는 첫 인상 뒤에 상당히 정밀한 엔지니어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몇 도에서 얼리고, 어느 정도의 지방과 수분을 유지하며, 몰드에서 어느 순간 빼내고, 서비스되는 시간까지 어떤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와 같은 파티세리의 시각적 즐거움은 결국 기술적으로 통제된 온도와 질감 위에서만 가능하다.
허니비의 시그니처 테디베어. 타히티 바닐라 휘핑 가나슈와 다크 초콜릿 크림에 체리 콩포트와 키르슈를 조합했다.
모양도 디저트의 맛이다
조은정 셰프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맛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형태다. 허니비의 시그니처 테디베어와 바스켓은 그녀를 기억하게 만드는 시각적 기호가 됐다. 이번 방콕에서의 행사를 위해서도, 초기 논의 단계부터 주최 측이 테디베어를 언급했다. 그래서 실제 디저트뿐 아니라 로비 한가운데 설치할 대형 쇼피스 역시 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조 셰프가 처음부터 형태를 브랜드 전략으로 계산했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맛과 레시피를 우선으로 두고 요리해 왔지만,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어떻게 하면 한눈에 기억되는 경험을 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테디베어도 사실 갓 3돌을 넘긴 ‘아기’다. 이처럼 한 눈에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대표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계절마다 색과 맛, 장식은 바꾸는 방식을 택했다. 손님들이 자신을 기억하는 속도가 이전보다 확연히 빨라졌다는 느낌도 그 이후였다.
올해 이탈리아의 몰드 전문 브랜드 실리코마트(Silikomart)와 자신의 시그니처 형태를 바탕으로 한 제품 출시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조 셰프의 설명.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페이스트리 셰프 중, 해당 브랜드와 처음으로 작업하는 케이스다. 수년간 반복해서 다듬은 하나의 형태가 서울의 숍에서 시작해 해외의 파티시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확장된다.
허니비 팀은 방콕 현지 셰프와 함께 태국의 전통적인 길거리 간식들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혼자 만드는 디저트가 아닌, 함께 만드는 경험
월드 고메 페스티벌의 중요한 키워드는 ‘협업’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게스트 셰프와 아난타라 시암 팀이 한 주방에서 지식과 기술, 서로 다른 음식 문화를 교류했다. 이번 애프터눈 티에서도 다섯 가지 디저트는 게스트인 조 셰프의 영역이었지만, 함께 제공되는 세이보리는 아난타라 시암 팀이 담당했다. 조은정 셰프가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을 비롯해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재료와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하고, 현지 팀은 자신들의 주방과 식재료에 맞춰 그것을 메뉴로 발전시켰다. 한국 셰프의 아이디어를 다른 문화권의 주방에 건네고, 태국 현지의 관점에서 이를 다시 재해석해 맛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골자다.
해외에서의 행사는 늘 셰프에게 새로운 맛을 발견하게 한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해외에서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곳은 칵테일 바다. 서로 다른 술과 과일, 허브, 향신료를 짧은 한 잔 안에 엮는 바텐더들의 조합에서 자주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것이 조 셰프의 설명. 해외 행사를 마치고 아무리 늦은 시간이 되어도 팀원들과 바를 찾고, 새로운 칵테일을 마시며 다음 디저트를 떠올리는 일이 오래된 습관이다. 과거 방콕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할 때에도 그렇게 발견한 조합을 서울로 돌아가 디저트로 발전시키곤 했다.
‘디저트는 행복함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조은정 셰프
디저트는 한 입에 행복해야 한다
조은정 셰프에게 그녀가 추구하는 디저트의 모습을 묻자,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척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거에는 어떤 맛, 어떤 모양의 디저트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즐거워할까를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결국 디저트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니까요.” 좋은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복잡한 기술과 여러 겹의 구성, 정확한 온도와 질감을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먹는 사람의 반응은 때로 놀라울 만큼 즉각적이다. “디저트라는 건 한 입에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방콕의 손님들이 이번 경험을 행복하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아난타라 시암 방콕 로비에 설치된 테디베어와 조은정 셰프
26회를 맞은 World Gourmet Festival의 로비에 조은정 셰프의 시그니처 디저트를 상징하는 거대한 테디베어가 꽃밭 한가운데 놓여 있던 모습. 서울에서 이미 익숙했던 그녀의 시그니처를 지키면서도, 그 주변에는 방콕이라는 새로운 도시가 있었다. 사람들은 꽃 사이에서 작은 디저트를 하나씩 꺼내 먹었고, 한국에서 날아온 밤과 곶감, 시트러스의 이야기를 들었다.